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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09-05-31 10:52:36
"인간적인 아! 너무나 인간적인 퇴계"
권준, 퇴계오솔길 한(韓)문화 기획전(11)
 

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1. 퇴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상가로서 그를 알려면 공자가 외치고 구현하고자 했던 (구)유학이 정주의 신유학을 거쳐그의 사후 2천5백년이 지나 조선 땅에서 4.7논변과 '성학십도', '심경부주 후론'으로 대변되는 퇴계 철학에 의해 만개되고 완성된 경위를 소상하게 파악하여야 한다.

백세의 사표로서의 삶을 알려면 조화 따라 자연으로 돌아 간지 5백년이 지났는데도 지금에도 여전히 그의 흔적이 삶의 좌표가 되는 이유를 발견하여야 한다. 그는 실로 너무나 탁월하고 위대한 일을 70년 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행하고 5백년  전에 이 땅을 떠나갔다.

어려서부터 반듯하게 자라 장성해서는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된 그의 삶은 한마디로 번다함을 물리고 온화함을 기르는 속에 고요함을 즐겼다고 생각된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나라와 백성에 보탬이 되는 일에 신명을 바쳤으며, 물러나서는 자신을 닦고 제자 기르는 일에 혼신을 다한 삶이었다. 마침내 그 하루하루의 정성과 돈실함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한편으론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어 공부하는 사람들의 태산과 북두가 되었고, 언행은 모든 이가 우러러 보는 본보기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자이면서 사상가인 퇴계의 모습일 것이며, 경론으로 심성을 닦아 종심의 경지에 오른 성현으로서의 퇴계의 진면목일 것이다.

며칠 전 안동문화원에 회의가 있어 참석을 한 일이 있다. 이 자리에서 여러 말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권위의 정의에 대해서 언급이 되었는데 치암고택 주손인 이동수 선생이 고금의 예를 들어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겉과 속이 일치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권위라는 것이다. 높은 직위나 권력에서 권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심복은 말과 행동이 뒷받침되었을 때 비로소 주어지고 생겨난다는 것이다. 탁월한 견해가 아닐 수 없는데 퇴계야말로 전형적인 이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일 것이다.

허나 나는 오늘 이러한 근엄한 퇴계를 감히 버리려고 한다. 대신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경이 되어버리는 가벼운 것들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성인의 시시콜콜한 가정사나 여자 이야기를 말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껴왔던 것이 사실이다. 행여나 본질이 아닌 변죽의 일들을 잘못 놀려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을까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 때문에 학인이나 문화를 확대하고 생산하는 사람이나 하나 같이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 것을 예의로 알았다.

나무랄 일도, 상찬할 일도 못되지만 단 하나 생각이 경직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인간 퇴계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너무나 고귀하고 숭고하여 우리가 근접하지 못하는 퇴계는 지금까지 기록문화로도 넘치고 충분하다.

이제는 인간 퇴계를 말해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도리어 매력이 물씬 풍기는 한 남자를 우리 곁에서 떼어놓고 퇴계를 논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도 울고 싶을 때 목 놓아 울고, 불인(不人)을 미워하고, 벼슬을 물린 것이 위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던 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를 말했다 해서 그가 이룩해 놓은 것들이 폄훼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인간이란 과정을 통해 정점에 도달하고, 도달하고서도 끝없이 마음을 다스리고 수행하여야 이룬 것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는 불완전함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난 존재임에랴.

2. 죽음의 미학

'죽음의 미학'이라고 소제목을 붙였다고 해서 인위적인 죽음을 찬양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인간에게 죽음에 관한 선택의 권리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며칠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생을 지켜온 가치가 적대적 포위(그렇다고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에 의해 무너지려는 순간, 죽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빼어들고 방어막을 쳤다. 가치와 신념을 훼손하려는 불순한 세력의 의도에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켜냈다고 할까? 그의 유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 달라. 오래된 생각이다." 

5백 년 전 한 남자도 말했다.

"자연의 조화 따라 돌아가는데 더 무엇을 구하리오.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라."
비석에 새겨질 글까지 미리 준비해 둔 퇴계였기에 오래된 생각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유언과 유서가 너무나 닮았다.

죽음에도 미학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즉, 태어난 개체는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요는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것이 모든 생명체가 안고 있는 숙명이지만 이 죽을 때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은 인간뿐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모든 창조적 행위는 유한성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생명이 지상에서 불멸이라면 인간은 누구도 뭔가를 창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든지 주어져 있는 상태에서 굳이 정신작용으로 무엇을 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고갈되고 쇠퇴하게 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종족의 세대 간 이어짐이란 이 유한성의 법칙이 있기에 존속할 수가 있다. 유한성이 자연의 생명체를 유지하고 이어가는 불멸의 법칙인 것이다. 이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죽을 때도 품위를 갖추고자 한다. 스님들이 도 닦고 수행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죽을 때 잘 죽기 위해서다. 죽을 때조차 잘 죽기를 바라는 갈망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유일한 방식이다. 차원 높은 인간이란 죽을 때(삶의 과정을 포함하여)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인간이 종교를 발명한 것은 이 죽음 때문이다. 죽음의 해결 방안에 골몰하다 발견한 것이 종교의 바다다. 생각하여 보라. 하늘의 법을 물려받았든, 세상 법을 통달했던 육신의 쇠락을 막아낼 수는 없다. 해탈이란 법신(정신=영혼)의 해탈일 뿐, 육신(肉身)은 구원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었던 세존도 돼지고기 잘못 먹고 설사와 식중독(?)으로 죽었다. 육체를 구원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차선으로 정신의 구원이 대두되고 설정이 된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이기심을 발동하여 육체적 구원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아마 이만한 다행도 없을 것이지만)히도 인류가 이 땅에 생명체로 생성되고 난후, 그 어떤 비범한 인간도 이 육체적 구원을 달성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그렇다. 지금껏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교적 방식의 종교관이 탄생했다. 유교는 현실 지향적이다. 다른 세계에 따로 신을 만들지 않았다. 동양적 세계관에는 불멸의 신이 없다.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강력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양적 사유의 체계에서는 과학과 사상과 철학이 혼재하여 있다. 동서양 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과학과 종교의 분리여부다.

서양은 기독교와 과학이 따로 분리되어 각기 발전을 추구한 까닭에 동양보다 과학문명이 앞섰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으로 신을 규명할 수 없는 까닭에 일찍 감치 포기를 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양에서 발생한 불교와 유교는 그 자체가 철학이고 사상이고 과학이고 종교다. 내 말이 틀렸는가?

유교의 태극원리, 음행오행, 주역은 과학이면서 그 자체가 철학이고 종교다. 불교의 삼천대천세계는 인도적 세계관이고, 연기론을 비롯한 모든 경전의 말씀은 물리학과 분자생물학으로 규명이 가능한 곳에 존재(?)한다.

자, 이쯤하고 이제 그림을 보라.  퇴계가 서책을 편 채 낮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그 앞에 나란히 3명의 남자 아이가 가르침을 받고 있다. 제자라고 하여도 별반 무리가 없다. 그러나 권준은 이 그림을 자식으로 그렸다고 한다.

▷ 유교로부터의 구원1 (38cm×55cm)                                                                 Oil on canson pape

준, 채, 적. 퇴계의 자제 중 한명이 어깨만 보이고 얼굴과 몸체가 보이지 않는다. 누굴까?
권준은 서자인 적을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하여 놓았다.

이 그림의 제목은 '유교로부터의 구원1'이다. 왜 그림의 제목이 구원일까?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하겠다.

유교는 현실에서의 육체적 구원을 추구한 유일한 고등종교다. 이제껏 이렇게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내 말이 다소 황당하게 들릴 것이나 그 어떤 유학자도 이 말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유교는 혈육과 교육을 통한 구원을 갈망했다. 이것이 본질이다. 즉, 자식교육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하고자 했고, 그 자식이 손주를 생산하여 가며 대를 이어가는 것으로 자신이 살아있고 영원성을 간직할 수 있다고 봤다.

권준은 이것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림은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 것은 과학과의 일치성이다. 유교는 통상적으로 불천위를 제외하곤 4대 봉사를 한다. 5대째가 되면 맨 앞에 분의 신위를 땅 속에 묻는다. 자식을 통해 영원성을 기원했으나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120년의 세월이 흐르면 영원성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땅으로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분자생물학의 입장에서 논구하면 자식에게 물려준 유전자(나)가 세대가 흐르면서 자신(나)의 것이 점차 희박하여져 가는 과학적 결과와 일치한다.  

이 가운데 퇴계 가문은 여기서 몇 가지를 더해 영원성을 확보했다. 퇴계의 부친인 진사 이식이 말하기를 "자식 중에 학문을 추구한 자신의 뜻을 이어갈 사람이 있다면 여한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유풍은 숙부인 송재 이우를 통해서 고스란히 퇴계 형제들에게 대물림되었다. 그것을 이황이 완성한 것이다.

그림은 이 완결의 완연한 징표를 자식 셋 앞에 두고 훈육하는 퇴계에 모습으로 완전함을 표현하고자 했으리라. 이 보다 더 낳은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퇴계가문은 혈연에 대한 교육, 문자의 기록, 최고 철학이라는 명징한 징표(이기론), 서원에서의 제자교육, 경연에서의 임금교육, 그리고 몸가짐의 행동에 모범적 모델을 세웠다는 7가지의 영원성을 획득한 것이다. 세계 5대 성인 가운데서도 이 일곱가지 모두를 완성한 인물은 없다.

유림이 군자라는 이상적 모델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스스로 바른 정신과 몸가짐이 아니고는 자신은 물론, 후손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것의 추구와 동시에 2차적 구원에 나서야 불교에서 말하는 대승이 될 수 있었다.

산림에 묻혀 안빈낙도하며 산천을 즐긴 수많은 선비가 있었으나 그들이 기록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위해서 살다간 범부일 뿐이다. 적어도 구원의 차원에서는 그렇다. 깨달음을 위해 산속에 쳐 박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수도하는 것이 최고의 경지라고 치켜세우는 풍토는 앞 뒤 맥락의 공부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삶의 체계가 언어와 문자로 되어있고 소통의 방식이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불립문자고 이심전심법이고 다 헛소릴 일 수 밖에 없다. 타인과 동떨어져 말하지 않고 쓰지 않으면서 오로지 향기로 인간을 제도할 수 있다는 것은 허상이고 구라다.

석가세존이 보리수나무에서 깨달음을 얻고 맨 먼저 한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말하지 않고서는 소통이 불가능했기에 말을 했던 것이다. 말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었겠으며, 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새로운 법이 생겼겠으며, 말하지 않았다면 그 법이 어떻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수가 되었겠는가?

우리가 역사에서 모델로 삼아 공부하고 배우는 인물은 모조리 이 언어와 문자의 프레임에 정확하게 천착되어 있다. 스스로 말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고 가정하여도 그는 반드시 타인과 소통했다. 향기로 소통된 것은 그 향기를 맡은 사람이 말하고 기록하는 법이다. 

유학자에게 불교에서처럼 대승이 되는 길은 집단구원에 나서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글 공부하는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공덕일 것이다. 자신과 혈육 그리고 집안을 구원하는 1차 목표와 동시에 2차 목표 또한 군자에게는 함께 행해졌다.

서원에서의 강학이 그것이다. 심학과 도문학에 몰두하며 퇴계가 제자를 교육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집단구원의 2차적 방식이다.

그렇다면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구원방식은 무엇일까? 바로 공자가 행하려고 한 방법이다.  공자가 주유천하를 한 것은 가장 단위가 큰 집단구원(국가) 방식을 실현하려는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가는 시대가 불우했으므로 제왕학을 펼쳐볼 기회를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는 교육으로 구원하고 위로부터 아래로의 구원은 다스림(덕치)을 통한 구원이었다.

퇴계가 벼슬길에 나아가 경연을 통해 임금을 교화하려고 한 것은 바로 임금 한 사람의 구원이 전백성의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이가 들어 오래도록 경연에서 선조를 가르치지는 못했으나 먼저 육조소를 올리고 나중에 그의 철학의 총체인 성학십도를 올린 것은 그 한 예다.

전란으로 문치를 꽃피우는데 한계가 있었으나 선조 치세기를 목릉성제(穆陵盛際-사림의 전성기로 인재가 넘쳐 나던 시기)라고 말하는 밑바탕에는 퇴계의 가르침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의 가정사부터 한 번 둘러보자.
아버지 이식은 정랑 김한철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2남 1녀를 두었으나 사별한 후, 사정 벼슬을 지낸 박치의 여식인 춘천박씨에게 새롭게 장가들어 4남1녀를 낳았다. 퇴계는 4형제 중 막내다. 그러나 퇴계의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녹록하지가 않았다.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등져 홀어머니 밑에서 팍팍한 인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4형제(이복형제 제외)가운데 그와 노년을 함께 한 형제는 바로 위의 형인 찰방공 이징뿐이다. 맏형은 어린 나이에, 둘째형은 장가들어서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퇴계가 가장 의지했던 형은 온계 이해였다. 그러나 대사헌과 충청감사, 한성부 우윤을 지낸 온계는 퇴계가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도산에 내려와 있던 시기에 윤형원 일파(이기)의 모함에 의해 유배를 가다 장독이 퍼져 죽었다. 그 시신을 퇴계는 단양으로 나아가 울면서 맞았다.

그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는 퇴계언행록에 기록(제자 우성전 기록)되어 있다.
정순목 교수가 쓴 퇴계평전의 한 대목이다.

"선생의 넷째 형(온계 이해:1496~1550)이 갑산으로 귀양을 떠났는데 성(양주 미아리 부근)을 나서자 세상을 떠났다.(매 맞은 독이 온 몸에 퍼져 8월14일에 죽음) 나(우성전)의 부친이 금오랑(소위 금부도시라고 함)으로서 대사헌공을 호위하고 갔다. 을축년(1565년) 가을에 선생이 나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주(성주라고 말한 것은 우성전의 부친 언겸이 당시 안동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게 평소 은혜를 입고도 그 때의 일을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하고 흐느껴 울면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이 마치 초상 때 슬퍼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퇴계의 고뇌를 연민의 눈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보통 인간이 생각하는 범주의 영역에서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남자다. 늘 죽음을 떠올리는 외롭고 고독한 남자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5년이 지난 뒤에도 당시 호송관을 만나자 형의 죽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곡하며 구슬프게 운 퇴계였다.

앞전에 언급했던 생후 7개월 만에 부친을 잃었고, 27세 때는 어린자식을 두고 가는 첫째 부인 허씨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퇴계다. 46세 때는 둘째 부인 권씨마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퇴계의 가슴을 도려낸 아픈 죽음은 자식의 죽음일 것이다.  48세 때는 둘째 아들 채(1527~1548:태어나자마자 생모와 사별했고, 성장해서는 경남의령의 작은 할아버지 댁에 양자 입양되었다. 즉, 외손봉사를 하며 그곳에서 장가를 들었으나 정혼만 한 채 21살의 나이로 죽었다.)가 죽었다는 비보를 단양군수로 있으면서 접했다. 51세 때는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형(온계)을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죽음은 이해의 아들인 조카 복과 치의 죽음과 손자 안도가 낳은 어린 자식이 젖이 모자라 일찍 죽은 사건이다. 조카의 죽음 앞에서 퇴계는 우리 집안이 하늘에 어떤 죄를 저질렀기에 연이어 이러한 일이 있는가, 라며 통곡했고, 안도의 어린 자식의 죽음은 퇴계와도 깊은 연관이 있어 할아버지로서 인간적인 슬픔을 맛보았을 것이다.(권준퇴계오솔길韓문화기획전 10편 참조)그리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린 첫째 형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던 남자였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퇴계철학이 여기서 출발했다고 믿고 있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성이 사상과 기록, 언행에 있다고 본 것은 아닐까?

타고난 심성, 그리고 어머니 박씨와 숙부 송재공으로부터 물려받고 체득된 가풍(家風)과 유풍(儒風)이 어지러운 세상과 결합하면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학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3. 결혼생활

이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할 사항이 있어 최인호의 소설 '유림'을 권준화백에게 빌려서 읽어보았다. 구상하고 자료 조사하는 기간이 15년이나 된 만큼 퇴계와 관련하여 거의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픽션이 필연적으로 가미되는 소설에 텍스트(일화포함)가 이만큼 충실한 소설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까지 장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의 발품과 자료조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 했다.

그런데 천하의 최인호가 큰 실수를 했다. 퇴계의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소실 부인을 빠뜨린 것이다. 의아함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는 기생 두향과의 관계설정 때문에 극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랬나 싶어 다시 읽어 보았다.

그러나 이미 두향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마당에 측실 부인을 굳이 글에서 숨길 이유가 없고, 언행록에서 일화까지 모조리 동원된 글의 패턴으로 보았을 때 분명한 실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그의 소설이 인간퇴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소실부인의 역할을 빼놓고 퇴계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그의 소설에서 가정사를 비롯한 언급된 모든 부분이 정확한 기초자료에 의해 쓰여 졌고, 이 바탕 위에서 약간의 픽션이 가미되었을 뿐, 없는 사실을 있는 것으로, 있는 사실을 없는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상사별곡 편에 "아내(허씨 부인)가 죽은 후 3년 동안 줄곧 광부(曠夫-홀아비)로 지내다가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다."
두향과의 만남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단양에 군수로 있을 무렵에는 아내를 잃고 독수공방한지 어느덧 2년이 흘러가버린 뒤였다."

최인호는 퇴계의 독수공방을 근거로 삼아 두향과의 만남 즉, 운우지정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만약 그에게 첫째 부인과의 사별 후 줄곧 그와 자식들을 지켜준 부인이 있었다면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소설이 될 뿐이다. 더 정확한 사실은 만약 최인호가 퇴계에게 오늘날의 가정주부처럼 퇴계집안의 실질적인 가정을 책임진 부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소설의 전개와 패턴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최인호가 정말 중요한 부분을 놓친 것이 이상하여 인터넷으로 부인과 아들에 대한 검색을 해 보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하나같이 부인 둘에 아들 둘로 나왔다.

퇴계의 부인은 3명이었고, 아들 또한 3명이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소실 부인을 이야기 하면서 먼저 양해를 구할 것이 있다. 이것을 지금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당시 풍습으로 보면 1처2첩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법으로도 허용이 되었다. 더구나 당시 퇴계는 소실(小室)을 둘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곡절이 있었다. 첫째 부인이 결혼 7년 만에 죽을 때 맏아들 준은 5살, 둘째 아들 채는 생후 한 달이 되지 않았다. 핏덩이를 돌볼 누군가가 필요했다. 측실(側室) 부인은 이 때 들어와 퇴계가문을 살렸다.

 ▷ 유교로부터 구원2 (38cm×55cm)                                      Oil on canson pape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두 번째 그림의 제목 역시 권준화백의 동의를 얻어 '유교로부터 구원2'로 정했다.

이 그림은 퇴계가 매화나무에 꽃이 핀 봄날 집 마당에서 부인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다. 정확하게 그 부인이 허씨부인이지 권씨부인인지 측실부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얼굴과 자태에 연륜이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일찍 사별한 허씨 부인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16년간 함께 산 계비인 권씨부인 아니면 측실부인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권화백에게 누굴 그렸는지 넌지시 물어보았으나 빙그레 웃기만 할뿐 답이 없다. 이 경우는 보는 사람 편의에 따라 아무렇게 생각하여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림이 원래 보는 사람의 상상의 공간으로 채워지기에 더더욱 그렇다.

다만, 권화백의 말이 복식은 양반 댁 아녀자가 입는 옷을 고증에 따라 그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권씨부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다소곳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품 있는 자태가 권씨 부인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저 아래 권씨부인을 논하면서 기술하여 놓았다. 나는 이 여인이 측실 부인이라고 상상을 한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단정을 한다. 복식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아 뭐라고 말할 처지가 되지 못하지만 소실부인과 정실부인간의 옷차림에 차이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고, 퇴계 선생 옆에 오랜 세월 함께 했다면 기품은 저절로 얻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대의 환경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에게 이렇게라도 흔적을 남겨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온 것과 간 곳을 모르는 퇴계가의 여인에게 권준과 최성달이라도 한 줄의 글을 짓고, 선생 옆에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며 서 있는 이 여인의 인물화를 그려줌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 드리는 것이 소실 부인을 손님처럼 지극히 공경한 퇴계와, 아들 준과 채의 효성에도 부합하는 처사리라.

실제적으로 퇴계와 아들 준은 어릴 때부터 키워준 서모에게 남편 노릇 자식 노릇 제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황은 퇴계가 자식과 제자 그리고 지인들에게 3천여통의 편지를 남겼기 때문에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을 작고한 권오봉 교수가 1997년에 해제를 하여 책으로 출판을 했고, 그 해제된 편지글 가운데 준에게 보낸 편지가 516통인데 영남대의 이장우교수가 그중 164통을 편집했다. 이런 선학의 노력이 있어 편하고 쉽게 인간 퇴계를 만나볼 수가 있음이다. 아래는 그 가운데 측실에 관련된 일부의 글을 발췌했다.

"너의 서모의 말은 마땅히 남자종이 몰아야."
"의령의 일은 전 감사가 처리하였고.......너의 서모 또한 그렇게 알고 내려갔다."
"창원의 할미(퇴계선생의 소실의 어머니)가 이미 거기에 왔으니 그대로 머물게 하면 봄가을로 왕래하는 폐단을 없앨 수 있다........네가 마음 써서 호송하는 것을 알기에 그녀(서모)가 은혜에 감사히 여김도 또한 깊을 것이다."
"너의 서모는 마침 일이 있어 언문으로 답을 하지 못한다. 손환 등이 돌아갈 때 답장을 할 것이라고 하는 구나."
"너희 서모의 언문 편지를 동봉하기 때문에 길게 적지 않는다."
"너희 서모에게 왜 따로 편지를 보내지 않느냐."
"언문 편지는 보내지 아니한다. 모두 알아서 살펴보도록 하여라."

나는 퇴계의 측실과 관련된 글귀를 찾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직 이와 관련하여 제대로 된 정리와 해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퇴계학의 권위자인 정순목 선생의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것이고, 편지와 관련된 구체적 해석은 아니었다. 위에 참고 사항으로 몇 개의 예를 나열하여 두었으나 실은 이 사안이야말로 새롭게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다.

먼저 눈여겨 볼 대목은 정실부인의 자식과 측실간의 편지왕래다. 우리 역사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은 단 한건도 남아 있지 않다.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퇴계가의 예도 물론, 직접 정실 자식을 측실이 키운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 효도라는 면에서 퇴계가 자식들에게 인위적으로 가르치려고 흔적은 가례 측면에서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어디서 읽은 글 가운데 똑 같은 예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자식 없는 소실 부인에게 재산을 물려준 분재기가 떠오른다. 그 분재기의 내용이 살아서는 소실의 소유지만 죽으면 정실 자식에 물려준다는 증서였다. 이렇게 한 까닭은 아마 늙은 양반 남편이 먼저 죽는 경우를 대비해서 작성한 분재기일 것이다.

남편이 죽고 난 후, 정실자식들이 홀대할까봐 재산을 소실 앞으로 해 두고 자식들의 효도를 유인한 것이리라. 

어째든 전후 사정이 이러하고 정실자식과 측실 간의 법이 아닌 정리의 측면을 파악할 근거가 너무나 부족함으로 우리는 퇴계와 아들 준의 서신왕래 내용을 통하여 이러한 바를 귀하게 살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랴. 편지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은 있는데 주고받은 증표가 없는 것이다. 기록에 철저한 가풍을 이어왔고, 그 기록된 유품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겼던 집안에서 이 기록이 사라졌다는 것이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실(遺失)되었을까? 만약 유실되었다면 1차적 원인은 제자들이 퇴계선생 사후 문집을 정리하고 편찬할 때 편지 내용을 대부분은 빼 버리고 싣지 않은데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편지글은 10%밖에 문집에 실리지 않았다. 아마 시시콜콜한 내용들이 선생의 품위를 손상할 수 있다는 제자들의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빠져버린 편지의 보관상 문제로 이 같은 일이 발생했는지 아니면, 후대에 오면서 집안의 체면 때문에 일부러 훼손했는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다만, 이것이 남아 있었으면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퇴계 집안의 품격을 깎는 것이 아니라 통유가(通儒家)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어째든 이 편지가 지금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은 가슴 저미고 통탄할 일이다.

연보를 보면 퇴계 나이 31세에 이 측실부인에게서 적(寂)이라는 아들 하나가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30세에 정실부인으로 권질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였으니 그 이듬해의 일이다. 퇴계는 가정적으로 이 측실 부인에게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접빈객을 맞고 봉제사를 받드는 일을 측실이 못하는 관계로 정실부인을 새롭게 맞이했으나 실질적 안주인 노릇은 측실의 몫이었다고 보여 진다. 다시 말하면 이 측실부인이 있었기에 실성한 권씨부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권씨부인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서자와 관련된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퇴계의 유언을 정리하면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정리하라는 당부는 대학자로서의 모습으로 읽힌다. 그리고 매분(매화분재)에 물을 주라. 돌려놓으라고 말한 대목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생명관이다. 평소 인간학 정립에 매진했던 퇴계였기에 죽음을 앞두고 생명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드러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매분을 연정의 대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매화와 기생 두향이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퇴계는 마지막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서자 동생인 적과 서모에게 집을 나눠주고 전답을 주라는 말이었다.

나는 이것이 자신과 집안을 있게 한 측실부인에 대한 퇴계의 마지막 배려였다고 생각된다. 이후 퇴계집안에서는 족보에서 서자라는 표기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퇴계집안 차원에서 측실부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다.

정순목 박사는 퇴계가의 이 족보 전통이 영남유림 전체에 영향을 미쳐 일반적 경향이 되었다고 말한다.

다음으로는 둘째 부인인 권씨부인과 관련해서 살펴보겠다. 우리는 인간퇴계의 완성을 권씨부인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권씨부인이 실성한데는 가족사의 아픈 사연이 있다. 할아버지가 참판벼슬을 지내고 문명을 날린 권주인데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윤씨의 사약을 들고 갔다는 죄목에 연루되어 사약(갑자사화 1504. 연산군 10년)을 받고 죽었고, 할머니도 관비를 면하려고 자결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 권질은 거제도로 유배를 가야했다.
그리고 조광조 등 사림파가 숙청된 기묘사화이후, 신사무옥(1521)이 일어나 남은 사림파가 다시 쫓겨날 때 아우 전(?)이 장살되면서 권씨부인의 아버지 권질은 예안(禮安)으로 다시 유배가 되었다.
양대에 걸쳐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엄청난 비극을 어린 소녀가 온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퇴계는 이런 딸을 자신밖에는 달리 마음 놓고 맡길 데가 없다는 장인 권질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권씨 부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16년 결혼 생활하는 동안 간단치 않았던 퇴계의 고통이 여러 일화와 제자 이함형에게 준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제사상에서 떨어진 배를 치마 속에 감추고, 눈치 없이 밤을 먹고 싶어 하고, 흰 두루마기를 태우고는 빨간색 천으로 기워 퇴계를 곤경에 빠뜨릴 때도 지극한 마음으로 한 결 같이 모자라는 부인을 대했다.

퇴계는 전라도 순천 출신 제자 이함형이 정실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자 자신과 권씨부인과의 관계를 예로 들면 부부간의 도리를 다할 것을 편지로 타이른다. 간추려 일부만 싣는다.

........나는 일찍이 재혼하였으나 불행하였네.......생각이 심란하여 고통을 견디기 힘든 적이 없지는 않았으나.......근본도리를 게을리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에게 근심을 지울 수 있겠는가.  
 
이함형은 스승의 편지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 이후 부인과의 사이가 회복되었고 후사를 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이함형의 부인은 퇴계가 죽자 상복을 입고 3년상을 했으며 지금도 퇴계의 기일에는 이함형의 후손이 그때의 고마움으로 참석을 한다고 한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상례에 관해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16년 간 부부로 산 계비 권씨 부인이 죽었을 때 퇴계가 행한 죽음에 관한 제례가 그것이다. 그때 퇴계는 도산에 내려와 있었고 두 아들인 준과 채로 하여금 서울 서소문집에서 장사를 치르고 관을 도산으로 운구해 오라고 지시를 한다. 퇴계선생이 아들 준에게 쓴 편지를 소개한다.

"어떤 사람은 계모가 친모와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대게 뜻을 알지 못하며 경솔하게 하는 말로써 의가 아닌 것에 빠지게 함으로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퇴계서집성'을 펴낸 권오봉 박사는 퇴계의 이 편지글은 예(禮)를 변화시킨 하나의 중대한 효시로 보았다. 아들 준과 채가 퇴계의 명에 의해 적모복을 입고 상례를 치룬 것을 계기로 그때까지 계모를 하대하는 습속이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아! 너무나 인간적인 퇴계는 12편에서도 계속됩니다.>

  2009-05-31 10:52:36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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