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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09-06-15 11:26:15
"인간적인 아! 너무나 인간적인 퇴계"
권준, 퇴계오솔길 한(韓)문화 기획전(12)
 

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1.불멸의 사랑
소복 입은 여인이 바닥에 엎드린 채 구슬프게 곡하고 있다. 1570년(선조 2) 마침내 대석학이며 성현의 반열에 올랐던 이황이 70세 나이로 타계하자 그를 연모했던 기생 두향이 목 놓아 울고 있다.

 ▷ 상사별곡(38cm×55cm)                                                                                Oil on canson pape

300일간의 만남이었지만 두향은 퇴계가 숨을 거두자 목욕재계한 후 소복을 챙겨들고 단신으로 단양에서 2백리 길을 걸어 나흘 만에 도산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그때 한서암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두향은 상례 형식상 퇴계의 시신을 염한 제단에 직접 향 피우고 고개 조아리며 조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저 한서암 바라보이는 근처 어느 빈집이나 절간에서 밤낮으로 울음 울며 퇴계의 죽음을 슬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의 곡조를 이기지 못한 여자는 그 길로 단양으로 돌아와 강물에 몸을 던진다. 두 사람이 거문고를 타며 노닐었던 강선대를 생을 마감하는 장소로 선택한 것은 망부석이 될 정도로 한 남자만을 지극히 흠모했던 여인으로써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5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시공간을 넘어 이 이야기는 이제 불멸의 사랑으로 회자된다. 살아서는 그렇게 소망하던 퇴계가의 여인이 되지 못했으나 죽어서 불멸로 되살아나 그 원을 이룬 것이다.

불멸의 사랑. 제 몸 던지며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여자에게 붙여줄 사랑의 이름표로 이보다 나은 표현이 있을까? 그런데 기실 한 여자의 죽음이 등장하는데도 이 남녀 간의 사랑에는 무언가 극적인 요소가 미미하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배제된 데는 두 사람의 사랑이 환경이나 시대를 뛰어넘는 육체적이고 활동적인 공간으로의 이동이 억제된 채 심상으로 채운 연모의 정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대게 불멸의 사랑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의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이뤄지기 힘든 상대와의 사랑이며 둘째, 극적인 요소가 있고 비극을 잉태하게 되며 셋째,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 못하고 갖지 못하는 현실이기에 로망이 되고, 전설과 신화가 되어 끝없이 예술방면에서 콘텐츠로 부활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 영국 왕 헨리8세가 왕위를 버리고까지 지키려했던 이혼녀와 사랑.

호화로운 무덤 궁전 타지마할의 주인인 샤 자한(Shah Janhan)과 뭄타즈 마할(Mumtax Mahal).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겠다고 맹세했던 당 현종과 양귀비. 사랑하는 여자 이네스를 죽인 정적들에 처절하게 복수했던 페드로의 지독한 사랑. 우리는 이들의 농염한 사랑을 주저 없이 불멸이라고 부른다.

이들에 비해 두향과 퇴계의 사랑에는 이런 드라마틱한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퇴계와 두향의 사랑은 에로스가 아가페와 플라토닉으로 변환된 형식이다. 뜨거운 사랑 뒤에 이별이 왔고, 그 별리를 견디다 망부석이 되고, 뒤 따라 강물에 몸을 던져 살신공양을 할 만큼 그 사랑이 구구절절했으나 왠지 이 사랑엔 아가페 요소가 더 강해 보인다.

에로스+플라토닉 사랑을 하다가 플라토닉으로 전환된 사랑. 그리고 마지막엔 아가페 사랑이 된 두 사람의 만남과 인연 그리고 사랑은 우리는 지금도 이야기를 한다.   

분명 불멸의 사랑이란 공식에서는 드라마틱한 요소의 상쇄로 흥미가 반감되는데도 불구하고 연상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 뒤에 자연스럽게 불멸이라는 수식어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나는 두 사람의 사랑 패턴을 느끼는 순간 어떤 선입견도 없이 연상 작용을 일으키며 불멸로 귀결하는 묘한 의식의 진행과정을 무의식으로 경험했다. 어째서 기생과 관료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불멸로 전환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가 신이 없이도 종교가 될 수 있는 까닭과 유사하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어도 차원 높은 사랑은 필시 불멸로 귀결이 된다는 것을 두향과 퇴계의 사랑을 보면서 한 수 배웠다고 하면 어떨까?

2. 만남

두향과의 만남은 퇴계가 중앙의 권력다툼을 피해 처음으로 외직을 청하면서 이뤄졌다. 당초 퇴계는 청송부사를 원했으나 여러 사정 때문에 단양으로 오게 되었다. 두향은 단양군에 소속된 관기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18세. 신관 사또인 퇴계의 수발을 그녀가 들게 됨으로써 인연이 맺어졌다.

이 시기 퇴계는 심리적으로 많이 미편했다. 부임한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둘째 아들 채가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경남 의령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서 농사일을 감독하고 있었던 채는 당시 나이가 21살이었고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정혼한 여자가 있었다. 

퇴계는 채의 죽음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렸기 때문에 참척의 고통이 상당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퇴계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몸이 찢어질 듯 아프다.”

“지탱하기 힘들다.”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죽음만을 가다린다.”

“단양군에 와서 좋은 일이라곤 없고 자식을 잃어 병만 더욱 심하다.”

그 절망의 끝에서 퇴계가 의지한 건 단양의 산수와 두향의 따뜻한 품이었을 것이다. 그도 대학자 이전의 한 인간이었다. 지친 심신을 달래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까지 두향이 곁에서 많은 내조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 같은 정황을 파악하기에는 지금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전해오는 이야기들은 아마 사실일 것이지만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아무래도 마뜩찮은 주위의 여건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퇴계가 10개월 간의 단양군수직에서 물러나 이웃의 풍기군수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두 사람 간에 주고받은 서신의 흔적은 전혀 없다. 원래부터 두 사람간의 사신이 존재하지 않았는지 있었는데 유실되었는지도 우리로써는 지금 알 길이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두향이 퇴계가 떠나간 뒤 수절했다는 것이고, 이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뒤따라 자진했다는 이야기가 풍문을 타고 5백 년 동안 전해져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두향의 묘가 지금 단양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단양에서는 매년 5월 단오날 마을축제로 ‘두향제’를 열고 있다.

두향의 원래 무덤은 강선대 바로 위에 있었다. 이것이 1985년 이 일대에 댐이 축조되면서 무덤이 수장될 위기에 처하자 동네 사람들의 들고 일어나 현재의 강선대 산중턱으로 이장하였다.

무덤에 관한 기록은 그래도 어지간히 남아 있는 편이다. 두향의 무덤은 퇴계의 제자였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집안에서 한일합방 전까지 돌보았다고 한다.

그 연유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8년(1575년 12월1일)전 내자시정 이지번이 사망하였다............금상(선조)초년에 청풍군수를 제수하여 옛날 은거하던 곳에서 가깝게 살도록 했는데 이황이 강요하여 취임한 뒤 애쓰지 않고도 깨끗하게 잘 다스렸다. 떠나가자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기렸으며, 후인들은 모두 그의 풍절을 숭상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지번을 청풍군수에 제수하도록 힘쓴 사람이 이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산해는 바로 이황과 절친했던 이지번의 아들이다.

두향무덤의 표지석에도 두향과 퇴계, 이지번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두향이 단양팔경을 지정하기 위해서 청풍군수인 성함 이지번 선생에게 청풍 경계인 옥순봉을 양보 받도록 이황에게 청원하여 단양팔경을 지정하게 하였다.”

매우 재미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단양팔경의 완성이 두향의 요청 때문이었다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인간퇴계를 두향이라는 오아시스를 통해서 만나는 격이다. 그 만큼 이 내용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자아낸다. 

단양팔경은 도담삼봉, 석문,사인암,상하선암,중하선암 하하선암, 구담봉, 옥순봉을 말한다.그러나 퇴계가 옥순봉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하기 전까지는 단양칠경만 있었다.

그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옥순봉은 원래 단양에 속한 것이 아니고, 행정구역상 이웃 청풍 괴곡리에 편입되어 있었다. 단양과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퇴계는 직접 청풍부사를 찾아가 옥순봉을 단양에 양보하여 줄 것을 청원했으나 거절당하여 돌아오는 길에 경계에다 단구동문이라 각명해놓고 돌아왔다. 단구는 단양의 옛 지명인데 ‘신선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훗날의 청풍부사가 남의 지역에 함부로 군계를 정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옥순봉을 찾았다가 퇴계의 글씨인 것을 알고 옥순봉을 단양에 양보하여 단양팔경이 완성되었다.

그 훗날의 부사가 바로 이지번이다.

그러나 단양군에서 설치한 두향 표지석의 알림내용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두향이 퇴계에게 단양팔경의 완성을 위해 이웃의 청풍군수인 이지번에게 양보를 요청하라고 주문한 사실은 시기적으로 두 사람의 활동상황이 일치하지가 않는다. 이지번의 청풍군수 재임은 선초 1년인 1569년이고 퇴계는 1548년 48세 때 단양군수를 지냈다. 이지번의 청풍군 재임시절이라면 퇴계가 임종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표지석의 의미를 퇴계가 단양군수 시절 두향의 요청에 의해 옥순봉을 단양팔경에 편입하려 했던 일이 21년 만에 청풍군수 이지번에 의해 그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단양군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표지석의 내용을 역사적 근거에 맞게 새롭게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두향이 강선대 아래 몸을 누운지 그를 찾는 문인 학자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단양군수였던 수촌 임방(1640~1724)은 두향지묘라는 시를 남겼다. 무연고의 묘가 5백 년 동안 유실되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 같은 이들의 발걸음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一點孤墳是杜秋/ 외로운 무덤하나 두향이라네

降仙臺下楚江頭/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芳魂償得風流價/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絶勝眞娘葬虎丘/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

조선 영조 때의 문인학자 월암 이광려(李匡呂)도 두향 사후 150년이 지나 그를 흠모하는 시를 남겼다. 

퇴계의 후손들도 두향의 무덤을 외면하지 않았다. 10대손 중 한성부윤을 지낸 이휘재란 분과 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한 이휘영은 형제간이다. 아우인 이휘재의 운산집에 보면 형 이휘영이 퇴계 사후 3백년이 지나 두향의 묘소에 참배했다고 적고 있다.

지금 두향의 묘는 단양군과 퇴계 후손들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다. 후손들은 매년 10월 퇴계 선생의 묘제가 끝나면, 두향의 무덤에도 시제(時(祭)를 올리고 있다.

퇴계평전을 쓴 고 정순목 박사의 기록에도 이와 관련된 구절이 나온다.

유력한 후손들인 퇴계학회 이동준이사장, 이가원(퇴계 14대 후손)박사, 이근필 교장(퇴계 차종손)이 이 같은 사실을 증언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몰랐을 뿐  두향은 오래 전부터 퇴계가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자, 이것이 텍스트인데 이걸 갖고 이야기를 콘텐츠라는 시각으로 한 번 생각하여 보자. 이 그림의 제목이 ‘상산별곡’인데 두향을 그린 그림으로는 최초일 것이다. 그림으로 권준이 문화적 확대재생산을 한 것이다. 

문학방면에서는 소설가 정비석과 최인호가, 평전을 통해서는 한국국진흥원의 김종석 박사와 고 정순목 박사가 이 작업을 어느 정도 해 놓은 상태다. 그리고 오는 8월이면 전 한국콘텐츠진흥원 김준한 본부장이 안동국악단과 함께 창극 ‘두향’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스로마신화가 건축, 문학, 미술, 연극, 영화, 만화 등 다양한 예술의 방면에서 끝임 없이 문화적 확대재생산작업으로 부활을 이어가듯 두향과 퇴계의 사랑이야기도 콘텐츠로 되살려야 한다.

우리는 이제껏 이야기를 콘텐츠로 전환하는데 둔감했다. 단군신화가 신화 속에만 머무르고 신학의 영역은 물론, 문학의 영역에서조차 부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가능성을 타진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창작과 행위를 통해 이야기를 확대하지 않고서는 지역의 미래의 어둡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이걸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단양 구담봉 건너편의 강선대에 묻혀있는 기생두향의 무덤에 퇴계집안에서 제례를 올리는 모습을 영상에 담고, 재현을 통해 소복을 입은 두향이 단양~풍기를 거쳐 도산으로 가는 장면과 한서암 근처에서 망곡하는 모습을 재현한다면 이야기꺼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단양에서~풍기~도산서원까지 250리 길을 러브로드로 조성하고 이것을 치암고택 이동수박사가 만든 안동도산구곡길과 연결한다면 좋은 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과 사랑이야기를 먼저 스토리텔링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러브로드를 하루빨리 조성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그림은 남자와 여자가 고요히 마주 앉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의식이 진행되는 것처럼 정적이 흐른다.

 ▷ 씻김굿(38cm×55cm)                                                                                   Oil on canson pape

누굴까?

조선조 복식을 하고 남녀가 한방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퇴계와 퇴계의 둘째  며느리다.

나는 이 그림을 퇴계의 씻김굿의 한 장면으로 읽었다. 관계를 끊어내는 씻김굿 말이다.

대학시절 나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무녀가 씻김굿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애주(서울대 무용과 교수)의 이한열 씻김굿도 직접 보았다.

산자가 죽은 자를 보내는 일종의 의식인 씻김굿은 이윤택이 연출한 연극 ‘오구’의 제목이기도 하다. 씻김굿을 경상도 지방에서는 오구굿이라고 불렀다.

이 씻김굿은 사실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의식은 아니다. 음지의 의식을 제도권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성서에 예언자로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학자들이 엄격하게 요구하던 기존의 형식을 뒤엎고 물로의 세례를 주장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시원하고 혁명적인 발상인가?

이 세례자 요한의 발상을 벤치마킹한 사람이 예수다. 예수는 씻김을 당했고 씻김을 행했다. 막달리아 마리아는 예수의 발을 씻겼고,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봉사와 사랑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스승이 몸소 낮음의 실천을 했다고 해석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관계를 설정하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그림을 보고서도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유추할 수가 있다. 권준이 그린 그림에서도 우리는 저것이 조선시대의 복식이며, 가족관계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당시의 시대상이 남녀가 한 방에 거처할 수 없는 법적 문화적 풍토를 기록의 해석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유대교의 율법이 횡행하는 시대에 남자의 발을 씻겨주는 여자는 아내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제자의 발을 씻긴 예수의 행위도 씻김굿 의식의 일종으로 해석하여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이 세상과는 이별이다. 너희는 이로써(발의 씻김으로)나와 한 몸이 되었다. 나를 증거하고 진리를 증거 하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그렇다면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관계의 단절이다. 단절을 통한 해방이고 단절을 통한 새 출발이다.

퇴계는 둘째 며느리를 앞에 앉혀놓고 그녀가 감당하고 있는 시대의 굴레를 씻김굿으로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 대유학자라는 고명을 물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둘째 며느리의 둘레를 억압하고 있는 법도와 인습의 쇠사슬을 과감하고도 단호하게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퇴계의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데 이해를 위해서 부연설명을 조금 할까한다.

퇴계의 둘째 며느리란 정혼만 한 채 21살에 요절한 둘째아들 채의 부인을 말한다. 채는 당시 경남 의령에 있는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서 농사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대게의 문헌이 이렇게만 되어 있어서 상세한 이해를 위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채가 의령의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서 농사일을 관리했다는 의미는 그곳에 퇴계집안의 농토와 그 농토에 농사를 짓는 노비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 땅과 노비는 퇴계의 첫째 부인인 허씨가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다. 

퇴계는 21살에 진사 허찬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허찬은 영주 푸실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허찬의 장인은 청풍군수를 지낸 창계 문경동이라는 사람이다.

살림이 넉넉한 문경동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 재산을 사위인 허찬이 물려받았고, 허찬은 당시의 관례대로 아들딸 구별 없이 자녀에게 똑 같이 균등 배분하였다.

퇴계가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의 구절 중에도 영주 풋실과 경남의령의 타작에 관해 묻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허씨 부인이 물려받은 분재가 퇴계가의 재산이 된 경우다.

환원하면 둘째 아들 채가 경남의령의 작은 외할아버지 댁에서 농감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는 퇴계가의 재산관리와 직접적인 연관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채는 의령에서 외가댁의 주선으로 정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부인이 어디 사람이고, 누구의 여식인지는 문헌의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다.

채를 장사 지내는 데는 우연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채가 급사한 날이 퇴계가 단양군수로 1548년 정월에 부임한지 채 한 달이 못 된 시점이었으니 엄동의 겨울이었다.

가묘를 먼저 쓰고 나중에 이장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에 장사 지낼 돈을 남에게 빌려서 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특히 눈에 띄는 구절은 이 둘째 며느리에 대한 애달픔이다.

-채의 무덤은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무하리 고망봉 산기슭에 있다.-

“발인이 마침 대한이라 매서운 바람과 눈으로 추위가 심할 것이다. 무덤을 파는 일이 어려울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동상에 걸려 마음을 다해 일을 처리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구나..........장사지내는 어려움이 오히려 청상과부 혼자서 빈소를 지키는 어려움보다는 덜할 것이니 어찌하고 어찌할까? 초상을 당해서 겨우 장사지내 놓고 잇따라 이장을 하니, 분주하고 피로하며 상심하다가 끝내 병이 생겼으니 안타깝고 안타깝구나.”

퇴계가 맏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가 장사지내는 어려움보다 먼저 청상이 된 며느리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대목의 편지 구절을 읽는 순간 퇴계의 둘째, 며느리에 대한 씻김굿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씻김굿 관련 일화는 이미 여러 곳에 인용되어 있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일화로 유추하면 3년 상은 도산에서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어느 날 퇴계가 작은 며느리가 거처하는 뒤뜰을 거닐다가 방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 음식을 들어 보세요. 참 맛있어요.”

“부인 먼저 드세요.”

기이한 생각에 며느리 방안을 들여다 본 퇴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며느리가 베게에다 남편의 옷을 입혀놓고 수저로 밥을 떠먹이는 시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그 길로 둘째 며느리를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말거라.”

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 씻김굿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의 함의는 (이곳에) 억매이지 말고 인생 새 출발하라는 언질이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퇴계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가다 어느 허름한 집에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런데 저녁상 차려준 반찬이 희한하게도 입맛에 꼭 맞았다. 마치 집에서 먹는 음식 같았다. 아침에 길 떠나려는데 바깥주인이 버선을 내놓았다. 길손에게 주는 선물치고 과했기에 퇴계는 그것을 물렸으나 젊은 주인은 한사코 받기를 간청했다. 신어보니 이것도 치수가 꼭 맞았다.

퇴계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생각의 미진함을 확인하기 위해 걸어가다 떠나온 집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그때 집 대문에 반쯤 몸을 숨긴 한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떠난 보낸 둘째 며느리였다.

  2009-06-15 11:26:15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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