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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09-04-30 20:36:57
"스승과 제자 그리고 편지"
권준, 퇴계오솔길 한(韓)문화 기획전(9)
 

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지난 호 8편의 그림은 퇴계가 월천에게 편지를 쓴 뒤 전달하는 장면과 그 편지를 받아들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전달하러 가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이 제자인 월천이 문밖까지 나와서 스승의 사신(私信)을 전달받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길 나선 이'(38cm×55cm)                                                                       Oil on canson pape

이 그림들의 전체적 느낌은 한마디로 유유자적한 고적함이다. 번쇄한 벼슬길에서 물러나와 자연을 벗 삼아 독실하게 학문에 매진하는 스승과 제자의 모습은 이 시대에서도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제까지 연재된 그림이 그러했지만 그리고 써야 하는 나날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호 9편의 그림도 매한가지다. 첫 그림은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서원)을 나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 홀로 강 길을 걸어가고 있는 한 폭의 풍경은 도산서원 천연대 쪽에서 바라본 다래(월천)가는 전경이다. 강섶으로 아득히 이어진 길을 따라 스승이 제자를 만나기 위해 길을 걸어가는 있는 것이다.

스승의 종착지는 제자의 강학공간인 월천서당이다. 월천은 자신의 강학지소에 모습을 드러낸 스승퇴계를 손 모아 공손하게 맞고 있다. 퇴계에게 월천은 어떤 제자였을까?

우리는 흔히 부처님의 제자를 말할 때 장로였던 사리불을 지혜제일, 목건련을 신통제일, 부루나를 설법제일 아난존자를 다문제일이라는 식으로 명명하기를 좋아한다. 비슷한 예로 공자 제자에 관하여서도 전하여오는 이야기가 많다.

이름이 단목사인 자공은 논어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사람을 잘 다루어 돈을 많이 번 거상의 이미지다. 실질적으로 공자학단의 뒷바라지를 자공이 거의 혼자서 도맡아했다. 그러나 그는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각각 대부의 벼슬에 오를 만큼 경륜이 있었는데도 안회처럼 도를 즐기지 못한다는 스승 공자의 한마디에 후세의 평가가 아주 인색하게 된 인물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효행제일로는 공자보다 15살 아래였던, 민자건을 꼽을 수 있고, 덕행이 뛰어나기는 염백우가 최고였다. 공자학단의 최대 골치 덩어리로 그려져 있는 재여라는 인물도 흥미롭다. 공야장과 팔일편에 기록된 재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비꼬는 투로 언변제일로 불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공자학단의 가장 이색적인 인물은 자로일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양아치 하다가 공자를 만나 도리를 익혀 갓 쓰고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여 선비가 된 사람이다. 그런 그지만 호학을 목숨 걸고 하지 않으면 타고난 기질을 억누르기 힘들다는 것을 그의 삶이 보여준다. 그는 스승 공자가 걱정하던 대로 무모한 용맹성 때문에 버리지 않아도 될 목숨을 버렸는지 모른다.

염옹은 조직 관리력, 자유는 문학제일이었다. 자하는 예수와 석가의 제자로 치면 사도 바울과 아난존자와 같은 인물이다. 오늘날의 유교는 자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공자의 사상전파에 가장 기여한 인물이다. 자하의 계열에서 증자가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공자라는 성인을 구성하는 테제(이념의 강령이나 규칙)속에 어김없이 소크라테스와 예수 그리고 석가처럼 인물을 통한 안티테제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유다가 성인 예수의 요건을 구성하는 극적인 안티테제라면 소크라테스에게는 멜레토스가 있고, 세존에게는 데바닷다가 있다. 그리고 공자에게 이 염구라는 인물의 요소는 그를 더욱 훌륭하게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써 나무랄 때가 없어 보인다.

즉, 염구는 추종은 선, 배신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 함몰되거나 희생되어 변명 한마디 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버려진 인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죄는 논어의 ‘선진’ 옹야‘편에 수록되어 있는데 노나라 계강자 밑에서 벼슬할 때 스승 공자의 뜻을 저버려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 줄거리다.

우리는 염구의 변명을 듣지 못해 그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공자)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이 오히려 스승에게 이롭다고 여겨 그랬는지,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는지, 속으로 공자의 형태에 신물이 났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시점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역사가 기록중심으로 흘러왔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뿐이다. 4대 성인(석가, 예수,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5대 성인에 포함되는 노자는 도덕경을 남겼다.) 중 그 누구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나 이들의 공통점은 제자가 당대의 실상을 문자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 기록에서 우위를 선점한 인물이 역사적 논변이든 후대의 평가든 언제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누렸다는 사실을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당대의 실상을 크게 왜곡하지 않았다 하여도 역사적 기록에서 난도질당한 인물의 변명 없이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패턴이었다. 우리는 공격당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변명과 연구에 너무 취약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영웅주의에 취한 오래된 타성 때문일까? 아니면 바라볼 인물과 대상을 미화시키지 않으면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자랄 때는 신화적(배움의 모델) 인물에 취하는 풍토를 만들어주고 커서는 학문적 인간(분석된 모델)이 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사회가 가장 건강하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다. 아래의 글은 이러한 지론에 따른 쓴 나의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테제를 이어가는 인물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은 그를 멸시하고 경멸하고 결국은 아테네청년들을 선동했다는 미명으로 고발한 멜레토스 등 민주파일 것이다. 이것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지금 와서 적확하게 논구할 수도 없는 것이고, 관심도 없지만 우리는 플라톤이라는 철인이 남겨놓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 대화 편을 보고 그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사유의 체계에서 이러한 점을 바라볼 때. 하나는 당시의 상황으로 판단하는 역사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심취가 가져올 오류에 대한 경계가 없다면 얻어진 판단은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보완할 최고의 카드는 틈새 역사 해석이다. 정통해석을 수용하되, 각도를 돌려보거나 여러 측면에서 탐구하는 정신이야말로 통찰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 수 없다.

불교에서 부처님을 배반하여 곤경에 빠뜨린 인물로 묘사되는 데바닷다는 석가의 사촌이다. 밀행제일인 라훌라는 세존의 아들이고, 아난존자와 데바닷다는 재종형제다. 경전을 보면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시자로서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법을 전수받은 급문제자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에 데바닷다는 부처님에게 바위를 굴려 떨어뜨리고,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 달려들게 한 죄로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초기 승가집단이 형성되고 난 뒤 데바닷다는 부처님에게 반역한 극악무도한 비구로 지금껏 알려져 왔는데 실상은 엄격한 계율주의자였다는 것이 최근 경전을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에게 교단의 개혁을 요구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 일생동안 임야에 산다. 둘째, 일생동안 탁발에 의하여 음식을 얻어야 하며 신자의 집에 초대되어 음식대접을 받지 않는다. 셋째, 일생동안 분소의 즉, 남이 버린 베조각 옷만 입는다. 넷째, 나무아래에서 명상을 하며 원칙적으로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자지 않는다. 다섯째, 육류나 생선을 먹지 않는다.

초기승가집단에 이 원칙이 확고하게 서 있었기에 데바닷다는 부처님에게 원래 약속인 순혈주의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고, 세존은 피치 못하게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분파(데바닷다의 제바종도)가 생긴 것이다.

알다시피 데바닷다가 개혁 요구를 할 즈음 세존은 죽림정사, 기원정사, 녹자모강당 등 재가신자 중 유력자들의 기부에 의한 불교세력을 꾸준하게 늘리고 있는 형편이어서 엄격한 율법주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2천년 넘게 죽일 놈으로 매도된 데바닷다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것만으로 종교적 진실을 한 번 되짚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성권력이 죽인 억울함은 기성권력이 살려놓아야 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의 제자라고 칭하며 가사장삼을 걸치고 설법을 행하고 있다. 지나간 잘못을 고백할 줄 알아야 종교제도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집단문화가 건강하여 진다. 떼쓰고 벌떼처럼 요구만 하지 말고 묵묵히 자기 때부터 씻어내어야 전체 사회가 온전히 서로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유다는 그래도 이제 억울함이 다소나마 해소된 편에 속한다. 인류사 2천년 동안 한 개인으로서 유다처럼 심한 욕을 먹은 인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배반하고도 회개하여 교회의 반석인 된 까닭에 지금도 그는 초대 교황(1대 베드로~현 교황인 베네딕토16세는 265대)이라는 어마어마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반면 유다는 스승인 예수를 팔아먹은 놈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손가락질을 받았으니 무덤에서도 편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지만 전혀 반전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기록자와 기록된 자만 혜택을 누린다는 역사의 정칙 안에 어느 정도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는 자의 비애를 떨쳐낸 유다의 진실이 주류사회에서 얼마만큼의 효과를 낼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가 그전처럼 전혀 항변할 수 없던 약자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를 보유한 작은 권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글이 길어졌는데 실상은 월천 조목이 어떤 제자였을까를 생각하다가 놓치기 싫은 심상이 떠올라 허겁지겁 여기까지 달려왔다. 다시 묻는다. 퇴계에게 월천은 어떤 제자였고, 당시 퇴계 학단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나도 궁금하여 문헌을 다 찾아보았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퇴계 학단을 물려받아 예안 학단을 형성했던 조목 학단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신기루 같은 현상을 보았을 뿐이다.

분재기를 통한 재산형성 과정에 관한 논문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학단의 모습이 연구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으나 여러 책과 씨름하면서 몇 가지 단서를 찾아볼 수 있었음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것은 또한 지금껏 우리가 잘못 이해했거나 오해한 부분과도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첫째, 퇴계와 월천 그리고 학단의 제자들이 도학연원을 갈구한 나머지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길을 뜬구름 같이 생각했다는 오해이다. 이것은 참말로 오해 중 오해다. 특히 이러한 오해는 퇴계 선생이 생애를 통 털어 제수된 관직을 70여회 물러나면서 더욱 정설로 굳어졌는데 퇴계는 한 번도 그 누구에게 벼슬은 하찮은 것이고, 성인(도학)되는 공부가 지고지순의 가치라고 역설한 바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월천에게 제수된 참봉직에 취임하라고 권유한 것도 퇴계이며, 문원, 사경 아들 준 오수영 등 제자들이 번번이 대과에 낙방하자 자신이 잘못 가르치고 학단의 제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되었다는 주위의 핀잔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경향은 일부의 편향된 바가 아니고 줄기차고 일관된 퇴계의 생각이었고,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조당 김부륜 같이 일부 그러한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퇴계가 쓴 3천 통의 편지을 꼼꼼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와 같은 주장을 못할 것이다. 후대에 발간된 여러 책들이 이와 같은데 그 마음이 물론 그렇게 하여 퇴계를 더욱 높이려는 가상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는 심각한 왜곡이며, 왜곡을 하여 선현을 높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처사인지 깊이 생각하여 볼 일이다.

둘째는 학단의 강학 모습이다. 선생의 제자가 368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이 한꺼번에 퇴계의 강연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역동서원이나 월천서당, 도산서원에서 주역이나 심경부주를 강의했지만 건물의 구조를 보아 수용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도산서당 선생의 방이 완락재이고 마루가 암서헌인데 제자들은 이 마루에서 공부를 했다. 지금 보면 한 10명정도 앉을 수 있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정황은 퇴계가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이 된다. 용수사에 잠시 거처할 때 청송의 누구누구는 매일 그 먼 길을 걸어서 선생에게 물음을 구하러 왔으며 또 다른 제자는 노비의 집에 거처하면서까지 애달프게 학문을 구했으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돌려보냈다. 사문수간에도 3명이 도산서원에 남아서 공부하고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같은 정황을 풀이하여 보면 퇴계의 생각인즉, 공부는 독실하게 스스로 깨쳐야 한다는 뜻이며, 자신의 학문이 대과가 요구하는 체계와는 맞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 같은 반증은 특히 제자와 자제 준에게 보낸 편지에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영주의 거접에 참여하라는 당부는 당시 영주에 요즘처럼 입시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대과에 체계에 적절하게 대비하며 공부를 가르쳐 주는 학원에 매번 참여하라는 당부의 말은 경향을 잘 파악하여 꼭 급제하여 주기를 바라는 퇴계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와 더불어 퇴계에게 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대의는 도학에 대한 열망이었다. 앞뒤를 잘 살피면 퇴계가 제자들과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따로 있었음을 알게 된다. 과거 공부를 끊임없이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심경부주와 주자대전에 관해 탐독했고 의문 나는 점을 제자들과 의논하며 자신의 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퇴계는 주자대전을 독파한 뒤 제자들과의 문답을 시작할 즈음 명예직인 상호군으로 서울에 있으면서 정지운의 천명신도를 볼 수 있었던 것 또한 자신은 물론, 한국 사상사의 측면에서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그리고 이즈음 시점 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지운이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이다. 라고 한 것을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라고 수정한 부분인데 퇴계는 이가 스스로 발할 수 있다는 논리를 준비하며 자신의 사상체계를 서서히 갖추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봉과의 사단칠정 논변이라는 것도 이의 스스로 발함을 두고 벌인 긴 논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봉과 퇴계가 사단칠정 논변이 한창일 때 퇴계의 제자들도 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 정황이 사문수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월천과도 학문에 관한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대략 이 시기는 고봉과 사단칠정논변을 시작하고 난 뒤에 일이었다.
이 가운데 재미있는 편지 하나를 보았는데 소위 월천이 스승인 자신의 설을 지지하지 않고 여럿 제자들 앞에서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였던 바, 그것을 은근히 나무라는 퇴계의 편지는 읽는 이만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퇴계 오십이후 퇴계학단의 수준이 전국 최고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가 혼상의 제작이었다. 이 말은 퇴계학단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천문기구를 제작할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무척 궁금하여 여러 차례 나별의 정진호 선생 거처를 방문하여 의문점을 풀고 온 적이 있었다.

정 선생의 말인즉, 선기옥형은 요즘으로 치면 지구본이고 혼상은 하늘(별자리)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 혼상을 농암 이현보의 종손인 간재 이덕홍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만든 장소가 월천서당일 것이라고 정 선생은 추론하고 있었다. 아마 당시 예안학단의 근거지가 월천서당이었기 때문에 그런 추론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하는 오해는 벼슬을 물러나려한 근원적 이유에 대한 오해 같은 것이다. 퇴계가 벼슬자체를 싫어했다고 하면 그것은 큰 오해가 된다. 퇴계가 벼슬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정황은 여러 기록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오랫동안 대과에 급제하지 못한 아들이 사람 구실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던 모습은 지금의 어버이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가 벼슬에 물러나고자 한 것은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야당이었던 탓에 형 온계 이해가 반대파에 의해 장살로 죽었고, 같은 당파의 남인들 또한 수난을 당하는 데다 자신도 파직된 전례 등으로 정치적 환멸이 있었을 것이다. 퇴계가 활동하던 시기는 명종의 모후인 문정황후와 그의 동생인 소윤의 영수 윤형원이 득세하는 시절이었다. 퇴계의 입장에서 명종 임금 또한 그에게 높은 벼슬을 수 없이 제수했으나 어진이의 말을 귀담은 듣는다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장 근원적 이유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십 중반 넘어서는 정말 스스로 공부하고 저술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또 하나 논구해 볼 점은 예안학단에 관해서다. 권준 그림이 말하듯 자신의 강학지소를 몸소 찾아온 스승 퇴계에게 두 손을 모으고 다소곳한 자세로 스승의 말을 듣고 있는 전경은 퇴계학단의 고제로서의 역할을 하던 월천의 모습과 예안학단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말해 주는 듯하다.  

나는 권준의 그림을 비평하면서 한가지의 두려움과 한가지의 소원이 있다. 난해한 부분의 해석에 치중하다 글의 깊이만 얻고 그림의 향기를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두려움이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서양화를 보는 독자들이 그림과 글에서 수묵화의 향기를 진하게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것이 능력 밖이라 잘 되지 않는다.

이번호 글도 정신없이 잠자지 않고 쓰다 보니 두서없이 흘러와 버렸고 다소 딱딱한 비평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불완전성 때문에 독자들에게 당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과 글을 단편과 단락이 아닌 전체로 보아 줄 것을 부탁드린다. 그래야 그림에 칠해진 사상이 보이고, 매 단락과 단편을 관통하는 진한 산수화(풍경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요점은 전통적 산수 그림을 칭하는 것이 아니고, 인물에서 피어나는 향기를 말함이다. 소위 이것이 말이 되는지 모르겠으나 권준의 그림은 인물 산수화다. 산수가 중심이 아니고 인물이 중심인 풍경화다. 내말이 어폐가 있겠으나 바라보는 관점을 자연보다 인간에 방점을 둔다면, 인물산수화가 아니고 무엇인가?

김홍도 선우기우도, 정선 조어도, 이명우 어초문답도, 함윤덕 기려도, 윤두서 송하관폭도, 이경윤의 월하탄금도, 수하취면도, 고사탁족도가 모두 수묵으로 채색된 전통적 인물산수화라면 권준은 서양적 기법으로 동양의 산수와 인물의 정신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정확하게는 인물풍경화인 셈이다.

선현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었으나 우리가 그 선현에게서 정신의 진한 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권준의 연작 그림은 틀림없는 인물풍경화인 것이다.  

  '월천서당에 만남'(38cm×55cm)                                                                  Oil on canson paper

이걸 비교도 할 겸, 300여 년 전 당대 대표적 미술 비평가였던 조귀명의 산수그림에 대한 관념의 일단을 한번 들여다보자.

진짜 산수는 그림과 비슷하기를 바라고, 산수 그림은 진짜와 비슷하기를 바란다. 진짜와 비슷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귀히 여긴 것이요, 그림과 비슷하다는 것은 기교를 숭상한 것이다. 하늘의 자연스러움이야 원래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법이지만, 사람의 기교 또한 하늘보다 나은 점이 있지 않겠는가............ 나는 평생 기구하게 살았으나 유독 산수에만 연분이 있어, 지리산을 오르고 가야산을 구경하며, 삼동(三洞)을 찾아가고 사군(四郡)을 유람하였다. 하지만 이는 모두 스스로 기약하여 뜻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올 가을 화양동(華陽洞)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는데, 하늘이 내게 이 그림으로 누워서 실컷 유람하게 해 주었다. 여덟 폭의 환상적인 경관은 진짜 땅과 비교해도 모자랄 것이 없다. 어찌 낫고 못함을 따지느냐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어찌 진짜와 가짜를 가릴 필요가 있겠느냐고 답할 것이다.        

진한 산수화의 수묵향에 취해다면 이제 8,9편에 등장하는 다섯 편의 그림 중 두 번째 그림에 눈독을 들여 달라. 이 그림은 심부름 하는 사람이 편지를 전달하러 가는 모습이다. 퇴계와 월천 사이에서도 수많은 편지가 오갔지만 다양한 제자와 지인, 아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조선조 인물 가운데 퇴계처럼 편지를 많이 쓴 사람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것만 3천통이 넘는다. 그중 목판본으로 된 ‘퇴계선생문집’에 1천여 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제자와 주고받은 편지다.

퇴계가 편지글에 주목하게 된 것은 43세 때 접하게 된 주자대전의 영향이다. 심경부주를 어버이처럼 공경한 퇴계였지만 주자대전을 읽고 받은 사상적 충격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주자대전의 영향은 학문과 삶에 절대적 준거로 자리 잡아갔고, 학문적 토론의 방식 또한 편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주자의 편지글을 모아 '주서절요'를 엮은 퇴계는 자신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글을 모은 책 제목을  '자성록'이라 이름 지었다.

퇴계평전을 쓴 김종석 박사는 "(주자)편지에는 제자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차근차근 설명하는 스승의 열망과 정성이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간의 격려와 반성이 들어 있었다.......퇴계는 이것이 살아가는 도리에 대한 탐구이며 이것을 제자와 스승이 함께 깨우쳐 가는 과정임을 확인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 사상사에서 일대 획을 긋는 한국적주자학 즉, 퇴계 성리학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 역사적 사건을 연결하는 도구가 바로 편지였다. 퇴계가 성균관대사성에서 물러나 도산에 머물  때 32세의 기대승이 문과를 급제하고 인사차 들렀다가 13년간이나 편지로 지속된 학문토론이 바로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다.

월천에게 보낸 편지로만 묶은 사문수간에 인류가 본받아야할 스승 퇴계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면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은 학문토론의 수준 높은 모범의 전례를 보여주었다.

그 수없는 문답의 과정에 이 많은 편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 사람이 그림에서처럼 집안에서 부리던 종이었다. 흔히 전민(田民)으로 불린 이들은 계급적으로 노비의 신분이다. (고종 31)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신분제 폐지에 따라 공사노비제(公私奴婢制)를 전부 없애기 전까지 이들은 토지처럼 재산의 일부분이었다. 옛글의 분재기를 보면 형제자매가 재산을 나눌 때 종도 분배의 대상물이었다는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부터 노비가 등장하고 있고,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을 넘어오는 동안 종모법 종부법 등 노비에 관한 법이 오락가락 했으나 노비제가 완전 폐지될 때까지 이들이 고단한 삶을 살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퇴계의 편지글에도 너무나 많은 종의 이름이 등장한다. 사문수간에 보면 그대(월천)집의 종아이가 한가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라는 구절에서부터 아들 준에게 부친 편지글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이름이 굿동, 눗손, 순이, 솟동, 명복, 억필, 학숭, 중손, 연동, 가외, 갓금, 단금,잇산 돌손, 황석 등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는 종의 이름이다.

사노비의 경우 어느 양반 가문에 소속되어서 농사와 집안일을 했으며 그림에서처럼 편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했다. 퇴계 집안의 경우 둘째 채가 양자 입양된 외조부 집안인 경남 의령, 부인 허씨가 분재 받은 땅이 있는 영주 풋실, 본향인 도산, 벼슬살이한 서울 집. 첫째 아들 준의 처가인 외내와 제자들의 거처로 끊임없는 편지왕래가 이어졌다.

이 편지글을 유심히 읽은 사람이라면 인간퇴계의 진면목을 보았을 것이다.
"몸은 낮은 지위에 있으나, 만약 마음이 안정되고 청렴하여 욕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면, 반드시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저 군자는 마땅히 풍모는 소탈하고 우아하며 고요 담박하여 욕심을 적게 가짐으로써 스스로 처신한 뒤에 생업을 도모한다면 해로움이 없을 것이다. 만약 오로지 글을 읽어 우이하며 행실을 닦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망각하여 살림이나 늘이는 것이나 옷치장 같은 하찮은 것에 몰두하고 몸을 빠지게 하면, 이는 바로 향리의 속인이나 하는 짓이지 어찌 유가의 풍이 있다고 하겠는가?

특히, 편지에서 우리가 감동받는 것을 인간을 대하는 퇴계의 자세다. 손자 안도가 아이를 낳고 성균관에 유학할 때 아내가 젓이 모자라자 아이 낳아 젓을 먹이고 있는 집안 여종을 서울로 보낼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퇴계는 내 자식 살리려고 남의자식 죽이는 것은 할 짓이 못된다며 거절한다. 최하층의 편지 메신저들에까지 신분에 맞는 도리를 다했던 퇴계였기에 지금도 겨레의 사표로서 존숭을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고 권준은 이것을 그림으로 세상에 드러내고자 함이다.

다시 제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퇴계에게는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고봉 기대승을 위시한 문과에 급제한 인물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어째서 월천 조목만이 도산서당에 종향이 되었을까? 의문이 가고 궁금할 것이다. 이 점을 풀기 위해서라도 퇴계학단을 형성했던 중요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퇴계의 제자는 전라도의 기대승, 경기도 안산 출신의 김취려, 경북 성주의 한강 정구 등 전국적으로 다양했지만 류성룡과 김성일 처럼 안동 제자들이 많았고, 대부분은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 포진하고 있었다.

금난수와 월천은 처남매부지간으로 계문의 고제역할을 했고, '독락팔곡'과 '한거십팔곡'를 지은 권호문은 국문학사를 빛낸 인물이다. 외내에서 제자를 기르지 않았는데 그 까닭을 후조당 종손인 김준식 안동문화원장은 바로 이웃에 도산서당이 있어 모두 거기로 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을 반증하듯 이 외내에는 오천칠군자가 유명했다. 형제 재종 내외종간인 이들은 모두 퇴계의 제자들이었는데 이름을 열거하면 김부인, 김부필,김부사,김부우, 김부륜, 금응협, 금응훈이다.

백담 구봉령은 빼어난 문장력을 갖추었고, 회곡 권춘란은 성리학은 물론 도가, 음양가, 법가 등에 두루 정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밝았다.

퇴계에게 많은 제자가 있으나 내가 가장 흥미가 가는 인물은 농암의 종손인 간재 이덕홍과 비지 남치리다. 이덕홍과 남치리는 여러 제자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했다. 이덕홍이 스승의 명을 받고 선기옥형과 혼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거북선의 원설계도인 구갑선도를 제작했다는 것은 잘 모를 것이다. 안동대 국학부 안병걸교수가 쓴 글에 보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홍이 구갑선도를 제작했는데 그것이 이순신에게 전달되어 거북선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전달 경로는 류성룡을 통해서거나 아니면 퇴계 문도였던 형 이요신을 통해 이순신이 전달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덕홍은 특히 논어에 자공이 가장 많이 등장하듯 퇴계언행록에 질의응답이 가장 많은 제자이고 퇴계가 타계하기 하루 전 서적정리를 부탁할 만큼 아끼던 애제자였다.

그렇다면 공자에게 안회가 있고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 있듯 퇴계에게 안회와 플라톤은 누구일까? 이걸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서수용 선생의 말처럼 간재 이덕홍이라고 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간재의 위치는 단단하고 확고해 보인다.

월천이 그 긴 세월 그리고 스승 사후에도 퇴계문하의 고제로서 베드로와 자공 같은 역할을 했다면 간재는 말년 제자이지만 선생의 언행과 학문에 대한 독실함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점 우리는 또 한사람을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바로 비지 남치리다. 그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으나 남치리가 안회라는 인물이 역사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성격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21세에 이황문하에 들어왔는데 안회처럼 항상 살림이 곤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난에 늘 찌들려 있으면서도 유가의 풍모를 잃지 않고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문도들이 그를 안자(안회)라고 칭송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에 스승 이황이 타계했는데 문도들이 그에게 장례절차의 책임을 맡겨다는 사실이다. 20대에 상례로 추대되었다는 말인데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으론 단순히 그가 장례절차에 밝아 책임을 맡은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상황은 나라에서 베푸는 예장을 사양하라는 퇴계의 유언과 영의정의 예로서 장사지내라는 국왕의 명이 충돌하는 지점이었기에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28세의 남치리는 임금의 명과 스승의 유언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편지는 10편에서도 계속됩니다.>

  2009-04-30 20:36:57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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