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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09-07-01 11:26:56
"외롭지 않아야 할 자의 고독"
권준, 퇴계오솔길 한(韓)문화 기획전(13)
 

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연재 글이 이번 호로 13회를 맞는다. 매달 1일과 15일, 한 달에 두 번 연재가 되었다. 1년 계획이었으니 24회가 연재되어야 마땅하나 사정변경의 사유가 생겨 독자들에게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송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것 같다.

권준퇴계오솔길 한(韓)문화기획전은 경상북도 지방예술지원 공모에서 미술부문으로 3천만 원을 지원받았다. 책 출판과 그림 전시회를 여는데 필요한 지원금이다. 그 지원금으로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열리는 9월25일부터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 한국국학진흥원과 서울에서 그동안 연재된 그림과 글로 전시회와 출판기념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 때문에 적어도 준비기간을 감안하면 8월말에는 이 연재물을 마감해야 한다. 24회 분량이 17회로 막을 내려야 하는데 독자에게 약속 미 이행의 죄송함만 덜어낸다면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홀가분한 기분이다.

고백한다면 이 연재물은 내겐 너무 과분한 행위였다. 축적된 에너지가 미진한데다 그마저도 소진될 쯤 도망갈 기회가 주어졌으니 아마 해방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건 피 말리는 시간 싸움이다. 권화백의 처지에서는 보름에 2점 이상을 그려야 하는 부담감이 심정을 억누르는 압박감이 되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려진 그림을 보고 길어야 24시간, 짧으면 10시간 안에 화가의 고도의 정신적 표현을 설득력 있게 해석하여야 하는 상황이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척박한 상황에 둘 다 피로감이 누적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탈출구가 생긴 것으로 이해하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글씨, 연적, 필세, 벼루, 붓, 종이, 연상, 먹, 매화, 고택 두 편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와 도구를 나열하여 보았다. 그림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 매화' 외롭지 않아야할 자가 고독한 자의 벗이라 부르는 꽃(38cm×55cm)                 Oil on canson pape

이 그림의 줄지어 선 단어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거나 대상이 그저 어렴풋 잡힌다면 당신은 필시 더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랬듯 설익은 앎은 온전한 경험과 지식 앞에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보편사라고 보았을 때, 어느 한 시점 정체성의 확립은 그 무수한 삶의 흔적 가운데가장 양질의 문화로 대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서두에 내가 그림의 해석으로 정체성 문제를 화두로 던진 까닭은 오늘 이 글의 주된 내용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기실, 고백하자면 난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체계에서 종손이나 주손 지손 그리고 뜻있는 유림이 가꾸고 지키고자 했던 가치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들보다 더 처절하게 이 땅을 살다간 수많은 민중이 있는 한, 어차피 계급의 우위의 있던 그들의 삶이란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여, 이름 없이 사라져간 저 무수한 영혼의 삶을 제쳐두고 그들을 높이기엔 역사의식을 견지하기를 원했던 나의 성향 상 거부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관념의 체계를 바꾸었다 누가 나를 욕한다 하여도 개의치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흑백과 이분법에 갇힌 속 좁은 처사일 뿐, 부분의 삶에서 전체가 오면 앞에 것은 폐하는 것이 공부하는 자의 양심이다.

일부 그들의 패거리 성향과 남 깔보는 되먹지 못한 심성만 제외한다면 흘린 땀, 눈물, 회한, 지켜내고자 홀로 감당한 고독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면면히 이어져온 역사와 문화, 그들의 손으로 외롭게 일구고 지켜낸 끈끈한 삶의 뿌리와 줄기는 노력한 자, 의식한 자, 눈물과 땀 흘린 자의 몫으로 존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분들에게 진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연유는 생리학적 유전자의 전달이 아니라 문화적 유전자의 전달과 계승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난 독립유공자 후손이나 깨어 있는 자에게 깍듯이 대하듯 이들 종가와 유림의 문화를 제대로 계승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허리가 굽혀진다.

이 글을 쓰기 전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라는 책을 읽었다. 농암 17대 종손 이성원 박사가 쓴 글이다. 몇 달 전 농암종택에 갔다가 수북이 쌓인 그 책을 발견했으나 어려워 한권 달라는 말을 못했는데 얼마 전 용수사가 들렀다가 정외스님에게서 얻어 왔다.

나는 이 책에서 이번 호 권준 그림을 읽는 코드를 발견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외롭지 않아야할 인간이 절감하는 절대 고독과 가난을 감지한 것은 이 책의 영향이 워낙 컸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도 사실은 책 어느 대목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말은 도대체 무얼 의미할까. 고독하지 않아야 할 자의 고독이라니. 그림을 읽는 키워드가 여기에 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고, 갈 수도 없는 길을 홀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자는 고독하다. 그것이 관념, 관습이든 유풍이든 과거라고 인식되는 짐을 지고 가는 이상 고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온 몸으로 지켜 내어야할 그 무엇이 있는 자에게 외로움은 우연히 아니라 필연이다.

농암의 16대 종손도 그러했고, 지금의 종손도 그러했든가보다. 도산구곡창립총회에서 종손의 말은 이어졌다.

"한학에 뛰어난 선친이 부산대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종가를 지키느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나이 들어 선친의 글을 읽어보니 30대 초반에 이미 돈오의 경지에 든 정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선비의 삶이였을 것이고, 이러한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안동의 정신 즉, 원형의 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발 딛고 있는 찬란한 문화의 흔적과 유적이 배태되고 계승된 과정에 누군가 역할을 했다면 편향된 인식의 체계로 사시(斜視)가 되어 한쪽으로 볼 것이 아니라 힘을 합쳐 응원하고 힘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이미 우리의 정체성은 반상으로 가를 수 없는 평준화의 혜택을 그 누구나 골고루 입고 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현실 속에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상, 내가, 우리가 그들과 또 따른 나이고 우리일 수는 없다.

그 한 예로 우리가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바는 현재 우리의 정체성이다. 외국에 비춰지는 대한민국, 대한국인의 정체성을 요약하면 한옥, 한지, 한식, 한글, 한복, 한음악 이다.

이 중 안동과 관련된 것을 간추리면 고택은 전국 분포도 가운데 40%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안동이다. 안동은 불천위를 모시는 종가가 47집이고 불천위는 96명이나 된다. 그에 비해 학문이 높았고 문집이 방대한 다산 정약용과 율곡 이이, 퇴계와 학문을 다투었던 남명 조식의 종가는 어디에도 없다. 전라남도에 윤선도 종택인 '녹우당', 경상남도에 정여창 가문의 '일두종택'과 정온가문의 '동계종택', 충청도에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종택인 '명재종택'이 있긴 하지만 안동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이 연재물과 '안동도산구곡 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 때문에 안동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무수한 외지 사람이 안동의 종택에 와서 종부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왜 안동으로 오는 것이며, 와서 고택을 찾는지를 유추하여 보면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부와 종손은 안동문화를 전파하는 최일선의 전사들이다. 이것은 안동의 힘이고 대한민국 정신의 원류 같은 것이다.

한식브랜드 또한, 안동이 원형의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개인적 난 안동문화원에서 의뢰받은 '안동의 음식'이란 책을 쓰고 있는데 공부할수록 안동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음식이 너무나 많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아마 그 저변에는 음식을 문화로 인식한 수준 높은 선조들의 안목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음식디미방'은 김성일의 학문을 계승한 경당 장흥효의 따님인 정부인 안동장씨가 한글로 지은 고음식 조리서이고, '수운잡방'은 '오천군자리'의 설원당의 주인이었던 김유의 저작이다. 우리나라 10대 고조리서 가운데 2권이 안동에서 나왔다. 안동은 지금 안동음식 100선을 선정하고 시청 내 음식 관련 부서를 따로 만들어놓을 만큼 음식 산업화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기반의 원형문화를 이렇게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 안동이다 보니 명실상부하게 세계적으로 음식의 고장이 될 그날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

한복은 안동포(삼베)와 천연염색의 접목으로 경쟁력을 갖추어가고 있고, 안동한지는 하회마을 초입에 자리 잡고 산업화와 체험을 통해 안동의 정체성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다해내고 있다.

한음악은 일반 유행가수 위주로 진행되어 한류라는 거대한 문화흐름을 탄생시킨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올 초 국학진흥원에서 도산구곡을 현대음악으로 권영옥씨가 창작하여 발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처럼 하루빨리 농암의 '어부가'와 권호문의 '독락팔곡', '한거십팔곡'을 불후의 명곡인 '영산회상', '수제천', '종묘제례악'처럼 정악이 아니더라도 국악으로 작곡한다면 전통음악의 고장으로서 안동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안동은 한글을 제외하곤 모든 부문에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도 이 여섯 가지 브랜드 가운데 다섯 가지가 합치되는 곳이 없다. 그 만큼 안동은 한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지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나는 권준의 두 편 그림이 함축하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정확하게 거기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유하고 수준 높은 양질의 안동문화를 그림을 통해 문화적 확대 재생산을 하는 것은 정체성의 확보와 확인이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다시 구체적으로 고독과 가난, 선비와 군자 처사라는 주제로 그림 이야기를 좀 더 해 보겠다. 도산서당 앞 매화 그림이든, 글씨를 쓰고 있는 퇴계의 초상이든 이 그림은 선비의 처사적 생활상을 보여준다.

선비와 군자와 처사는 개념상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통상,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로서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고, '관직이 높고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군자라고 했다. 관직이 높은 사람을 군자라고 한 까닭은 옛날에는 학덕이 있는 훌륭한 사람이 벼슬을 얻어 정치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처사는 선비로서 평생 과거시험을 보지 않거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 경우를 흔히 그렇게 불렀다. 백이와 숙제의 예에서 보듯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산림처사는 관직에 나간 선비보다 존경을 더 받았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둘 다 존중받았다. 즉, 벼슬에 나아가 세상을 향해 도를 펼치든, 나아가지 않던, 중요한 것은 저술을 하고 후학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수하는 것이 군자, 선비, 처사적 삶의 요체였다.

이에 대해 공자는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어진 덕을 해치지 않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어진 덕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장자도 "선비가 위태로움을 당해서는 생명을 바치고, 이익을 얻게 될 때에는 의로움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맹자는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은 사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대학(大學)》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주어진 '밝은 덕을 밝히는 일'과 '백성과 친애하는 일'의 사회적 과제를 강조했다.

그러나 선비가 학문을 하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정해진 자리의 한정 탓으로 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요즘 같으며 실용성이 뒤진다고 여기는 인문학을 직업적으로 자기 분야가 아닌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문 예에 속하지만, 그 옛날에는 벼슬이 주어지지 않아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야 선비가 될 수 있었다.

그 현실적 가난 앞에 던져진 것이 고독 아니었을까? 이성원 박사는 자신의 선친이 일생 돈 한 푼 벌어오지 않으면서 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 때문에 가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선비에게 책 읽고 글 쓰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 서여기인(38cm×55cm)                                                     Oil on canson pape

그림에서 보면 권준은 글 쓰는 퇴계의 작은 소반 위에다 연적(수적=수주)과 필세(筆洗), 붓과 먹, 종이와 연상(硯床)등 선비가 글씨를 쓰는데 필요한 도구를 그려 놓았다. 예로부터 선비의 벗이라고 할 수 있는 문방사우는 지필묵연(紙筆墨硯)이었다. 세분하면 종이는 고려지, 붓은 황모필, 먹은 송연묵, 벼루는 단계연을 으뜸으로 쳤다.

하지만 선비의 고상한 한묵정취(翰墨情趣)를 채우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이것을 보완하는 위치에 붓을 놓아 두던 필가(筆架), 물을 담았던 수적(水滴), 벼루를 얹어 두었던 연상, 붓을 씻는 항아리인 필세가 있다.

이중 특히 연적은 아름다운 곡선미 때문에 지금도 수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물목이기도 하다. 비취색이나 백색 등 단조로운 색상으로도 신이하고 용의한 빛깔을 드러내 옛 선조들의 수준 높은 미적 감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연적이다.

손철주가 쓴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에 서울대 교수를 지낸 근원 김용준이 연적을 소재로 하여 쓴 수필 한 대목이 나온다.

골동품상에 들렀다가 생긴 꼴이 하도 우스운 두꺼비 연적을 발견한 근원이 그걸 냉큼 외상으로 사버렸다.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으나 쌀 한 되 살 돈이 없는 처지에서 그 놈의 두꺼비가 무슨 수로 우릴 먹여 살리느냐는 아내의 모진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근원은 "두꺼비를 산돈은 이놈의 두꺼비가 갚아줄 테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친다." 근원은 이 말에 책임지기 위해 두꺼비 연적을 소재로 잡문을 쓴다. 그러면서 말한다.

"잠꼬대 같은 이 한 편의 글 값이 행여 두꺼비 값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내 책상머리에 두꺼비 너를 두고 이 글을 쓸 때 네가 감정을 가진 물건이라면 필시 너도 슬퍼할 것이다."

그때 근원이 느꼈을 슬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창작욕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는 글 쓰는 자의 업보 같은 것이다. 그런 연적이 이제는 국보가 되어 있다. 가난의 선비의 친구였던 수주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값이 상당하게 매겨졌다. 아마 그 속에는 선비의 쏟았을 정신의 값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12세기 고려시대 작품인 '청자봉숭아연적'은 보물 제102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연적 2점은 국보다. '청자오리연적'은 국보 제74호로, '청자원숭이모자연적'은 국보 제270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고려의 '청자연적'과 조선의 '백자연적'이 일본으로 반출된 예도 허다하다. 19세기에 제작된'백자무릎연적'은 도쿄 오구라컬렉션이, '백자청화동채조각 다람쥐 장식 연적'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림에서도 무언가 쓰고 있는 퇴계의 자태는 사뭇 고요하고 단정하기 그지없다. 이 같은 퇴계의 자세는 평소 그의 몸가짐에 따른 자연스런 행태라고 할 수 있다.

기록에 보면 "종일 정좌하였고 혹 무릎을 포개 앉은 반좌를 할 때도 단정 장중하여 조금도 곁에 있는 물건에 기대지 않았다. 가끔 몸이 고단하면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우성전의 기록-

"평상시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갓을 쓰고 도포에 띠를 하고 서재로 나가면 얼굴빛은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조금도 몸을 기대는 일이 없었다."-정유일의 기록-

"젊은 시절부터 글씨는 꼭 정자로 썼는데 비록 과문이나 잡서를 베낄 때에도 함부로 쓰는 일이 적었다."
-김성일의 기록-

연적을 비롯한 문방사우는 글씨를 쓰기 위한 필수품목이다. 이 도구들로 쓰여 졌을 퇴계의 글씨는 여러 곳에 산재하여 전해오고 있다. 흔히 우리가 퇴필로 부르는 퇴계의 글씨는 그의 정신이 녹아 있는 실체로 평가되어 후한 값에 거래된다. 작은 간찰 한 장 도 5~6백만원을 주어야 살 수 있다.

퇴계는 현판 글씨에는 후했으나 남의 행장을 짓는 데는 신중했다. 일생 그가 지은 행장은 명종 사후 행장 짓는 일에 관여했다는 기록이 보이고, 충재 권벌, 농암 이현보,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금계 황준량 다섯 사람뿐이다.

옛 사람들은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하여 글씨를 곧 그 사람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인품론인데 세속장인의 마계에서 벗어난 정신의 격조가 풍기는 글씨를 당대 제일로 쳤다. 즉, 글씨를 독서수양으로 완성되는 예술로 본 것인데 퇴계야 말로 이러한 인품론에 비유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2009-07-01 11:26:56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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