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한 폭의 풍경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먼 산 너머에는 골마다 잔설이 희뿌였다. 눈보라 몰아친 나날의 여파가 풍경 여기저기에 묻어있다. 겨울의 한복판이다.

그 엄동에 한 사람이 한파를 헤치며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꽁꽁 언 강 위로 지나온 흔적의 발자국은 흡사 뒷사람이 걸어갈 이정표 같다. 시동(侍童)¹⁾마저 데려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홀로 사색의 길에 집 주인을 만나려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한 참을 걸어왔을 것이나 산문(山門)에 다다른 이에게 반겨주는 삽살개조차 없다. 인기척 없는 산집에서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길손의 낭패감이 보는 이에게로 밀려올 것 같다.    <1. 홀로 가는 길>

이번 호에 들어갈 풍경화에 대한 감상평을 적고, '홀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을 달아 보았다. 초두(初頭)²⁾의 방향을 설정했으니 부연설명은 이런 식으로 밀고 나가면 된다. 다행히 글감마저 무궁무진하게 떠올라 호흡에도 별 문제가 없다.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유 있는 돌변한다. 정신을 해독하고 다시 그림을 본다.

이 그림은 한마디로 참 묘하다. 첫 대면하는 순간 평화롭고 아름다운 음악 같은 선율이 먼저 가슴에 와 닿는다. 면을 색으로 칠한 풍경에서 코끝으로 진한 산수화 향기를 음미한다. 하나씩 뜯어보면 겨울이라는 황량함이 심상을 지배하고, 걷고 있는 나그네가 어떤 목적 같은 의미로 나열되지만, 그윽이 바라보면 식후의 나른한 충만감을 안겨준다.

바탕에 깔린 하얀색의 촉감 때문일까? 마루에서 오수(午睡)³⁾에 빠져들 것 같은 안정과 편안이 찾아든다. 한겨울에 낮잠이라니 기적이다. 산 좋고 물 좋으니(비록 얼어있지만)동양화로 치면 영락없는 산수화다. 거기다 정자까지 갖췄으니 삼합(三合)이 맞아 떨어졌다. 세상 사람들은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이 없다하나 여기가 무릉도원이다. 막 문전에 당도한 신선(神仙)의 귓가로 집안에서 학동의 글 읽은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올 것만 같다.     <2. 겨울의 평화>      
                                          
이번에는 그림의 제목으로 '겨울의 평화'라고 붙여본다.
위 '홀로 가는 길'은 행간(行間)⁴⁾을 덮고 씨줄과 날줄로 무한정 나아가려고 한 탓에 우울함이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 필시, 이런 방향의 글쓰기가 지속되었다면 그림 속 전경에서 가까운 사람의 속 밑바닥을 본 후의 허망함과 비애를 들추어 냈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그 아른거림을 놓치기 싫어 겨울이 주는 막막함에서 허덕이는 자의 뼈저린 울음에 귀기울이고 말았으리라. 허나, 나는 염세 말세의 유혹에서 빠져나와 '겨울의 평화'라는 주제로 옮겨가야 한다. 고독이 주는 따듯하고 온전한 기운만 간직한 채, 몇 순배의 독한 술로 글루미 선데이가 주는 광기를 벗어난다. 역시 술은 때때로 감정보다 독하다. <이제부터의 글쓰기는 위 두 가지 텍스트를 모두 원용하는 방식이다.>

그림을 보며 한번 깊게 생각해보자. 고독이 관조(觀照)⁵⁾ 없이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지. 우리네 인생사가 그러하지만 엇갈린 길에선 누군가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허나, 그것만으론 안 된다. 먼 길을 가다 부딪치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대책 없이 무너져도 가던 길은 마저 가야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고 대하는 것들이야말로 실하고 알찬 것들이다. 내게 있던 허울을 한 꺼풀 벗기고 주위를 바라보자. 산과 물은 의구(依舊)⁶⁾하되 이미 지난날의 산수가 아니다. 비할 바 없는 고독이 주는 통찰은 그 옛날의 산하(山河)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군상들을 정겨움과 감사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심상(心想)⁷⁾을 선사한다.

'고독과 관조'는 오늘, 그림 여행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글쓰기의 밑바탕 재료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바라보는 나와 그림이 하나가 되는 감성의 선이기도 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림을 바라보며 하얀 선과 하얀 형체와 하얀 점들을 눈 안에 넣고 가슴에 담아보라. 무엇이 느껴지는가? 한적함이다. 청정하되 무료하지 않고, 고요하나 적막에 물들지 않음이 한적함이다.

관조의 세계다. 유적미학(幽寂美學)⁸⁾이다. 당신이 만약 세파에 찌들려 하얀색(구름 눈)보는 것을 잊어버렸다면 진정한 고독을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다중과 어울려야 만족을 구하고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녕 고독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여 관조에 세계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다. 고독은 타인이 해소해 주는 외로움이 아니다. 근원적 고독은 자신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며, 그것을 통해 타인으로 육화(肉化)⁹⁾되는 고귀한 사랑의 전형이다.

명망 있는 장년의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을 견디지 못해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질 위험을 무릅쓰고 아테네의 국경을 넘어 청년 예수를 찾아갔다. 안회에게 공자가 없었다면 삶은 캄캄한 밤길이었을것이다. 성철과 청담이 세속의 처자를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난 것은 자신에게 닥친 근원적 고독을 해결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글은 참으로 난해하다. 그림 한 장 두고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논하고 있으니 내가 봐도 한심하고 미칠 지경이다. 그러니 경직된 자들은 읽지 마라. 내 글은 이뿐만 아니라 도발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선현의 일들을 다루면서 신화와 우화 그리고 권위를 생략하는 짓거리를 눈 말짱하게 뜨고 저지른다.

옛 사람에 지극히 돈실(敦實)¹⁰⁾한 우리네 정서와 심성을 한없이 미편(未便)¹¹⁾하게 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거창한 것도 없으면서 이 땅의 문화반복 학습이 지루하다고 주절거리고 다니지를 않나, 언젠가는 새로운 기풍과 사조가 전대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인간본성의 강렬한 추구로부터 견인되어야 한다고 떠벌리기까지 한다.

덧붙여 교활하기까지 해 시대의 기미(幾微)¹²⁾를 먼저 알아차리고 이것을 인식의 지평이라는 측면에서 아무도 부인 못할 역사적 흐름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범절 있는 유자들이 보았을 때, 전작에 이룬 문화적 성공을 부정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¹³⁾의 망발이다. 허나, 이런 일들은 늘 반복되기 마련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회화사에서 인상파의 등장은 필연이었으나 현실에서는 파란(波瀾)¹⁴⁾과 곡절(曲折)¹⁵⁾ 그 자체였다. 그들은 그전의 화가들처럼 그림을 단순히 아카데믹하게 그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의 관심은 영원한 것에서 순간을 포착해 정지시키는 일에 미쳐 구도를 해체하고, 원근을 무시하며, 명암을 물감으로 덧칠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회화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참다못한 알베르 볼프라는 비평가가 신랄하게 이들을 공격한다.

 ‥‥‥ 피사로 선생에게 나무 색깔은 보랏빛이 아니요, 하늘은 신선한 버터 빛깔이 아니요, 세상 어디에도 그가 그린 것과 같은 사물은 없으며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러한 미망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시켜주자 ‥‥‥ 드가 선생이 알아듣도록 설명 해주자. 미술은 데생, 색채, 제작방식 및 의도라는 이름의 몇 가지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해주자 ‥‥‥ 이번에는 르느와르 선생에게 여인의 토르소는 푸릇푸릇하고 보랏빛 나는 반점으로 뒤덮인 시체처럼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가 아니라고 말해주자. 다른 모든 미처 날뛰는 패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여자가 하나 끼여 있다. 그 이름은 베르뜨 모리조라고 하는데, 정말 한번 구경할만하다. 그녀의 정신은 미쳐 광란하고 있는데도 한 가닥 여성다운 우아함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36× 56(㎝)                                                                                                     canson on oil color

권준 퇴계오솔길 韓문화 기획전 또한 인상파 시대에 그들이 날뛰는 짓거리를 참다못한 교양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안동이라는 특수성은 다음과 같은 어마어마한 실험적 요소들을 수용하지 못할지 모른다.

첫째,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즉시 직접 독자와 대화하는 시스템(인터넷)을 세계 최초(?)로 시도했다는 점이다.
둘째, 스토리 텔링의 방식으로 선보이는 세계 최초(?)의 그림 전시회다.
셋째, 그림의 해석이 1차적으로 비평가의 활자에 의존하는 방식의 최초의 시도다.
넷째, 문맹률처럼 화맹률(畵盲率)¹⁶⁾이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 직접적 소통으로 완전한 이해를 돕는 방식이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기득의 전통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문화적 바로되먹임'으로 환치(換置)¹⁷⁾하고 환원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는 도전의지의 대표적 사례이며
여섯째, 음지에 있던 지방, 지역의 문화적 열패주의(劣敗主義)¹⁸⁾를 주권주의로 상승시키려는 상징성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좀 풀어서 이야기하면 수차례 언급했지만 키워드는 회화를 통한 문화적 바로되먹임이다. 옛 것이라 시시콜콜하다고 여겨졌던 공자 왈, 맹자 왈, 텍스트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문자를 통한 해체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으나 그림 본질에 있어서는 크게 왜곡이 없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독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이점을 백분 활용했다 ‥‥‥

회화를 가장 단순하게 독자에게 돌려주는 방법이 무엇일까? 친근하게 두게 하는 방안이 무엇일까? 일부 정신의 휘황한 사치품과 품격의 도구로 전락한 회화를 다수의 품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잠시 정신의 확장이라는 거창한 작가의 욕심을 죽이고 오로지 독자의 눈높이에서 해석하는 태도는 어떤 것일까? 이즘의 창조나 계승을 통한 예술성의 확보 통로가 아니고도 미학을 간직한 채, 다중이 선호하는 형식을 창출하는 자세란 무엇일까?

처음, 피중찬 편집인의 권유와 권준 화백의 호응에도 내가 끝까지 머뭇거린 것은 퇴계오솔길이 갖는 명료한 메시지가 오히려 부담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안동에 계시는 많은 분들처럼 유학이 이 시대의 병폐를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은 사람이다.

유교적 자본주의 같은 새로운 흐름을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념이나 종교 사상이 세력에 경도된 병폐 또한, 그 만큼의 해악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유학이 존중받아야 하는 시대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시대적 배경이란 이렇게 언제나 새로운 것, 다른 방향에서 현재의 활로를 개척하는 시도를 가능케 하는 원천으로써의 저력과 힘이다.

이러한 불가피성 때문에 누가 권준 그림에서 기록성과 종교, 신화를 거울삼고 있다고 경멸한다면 그건 일견 타당하다. 소재의 선택이 상당한 부담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방편이 개입했음을 부인할 생각도 없다. 그림이 내용과는 상관없는 교훈의 도덕성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힐난 또한 받을 만 하다.

이것은 오히려 작가의 개성과 감성 그리고 자유로움을 파괴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금기에 해당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파괴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창조의 가치에 비해 전통으로의회귀는 여전히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 피해야할 덕목이라는데 동의한다. 나올 것 다 나와서 더는 갈 곳이 없는 곳에서의 전통의 회귀라면 용인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갈 곳 없는 후퇴는 없다. 그것이 창조를 미덕으로 하는 예술의 영역에서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그럴듯한 주장에도 한 가지의 지혜가 빠져 있다. 다 보지 못한 것이 있다.

인상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시인 보들레르가 아카데믹한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에 '덧없이 순간적이며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요소를 경멸할 권리를 당신은 갖고 있지 않다고 했듯 나 또한, 변호하자면 권준의 환기성 회화에는 이 시대가 안고 있는 한계에 대한 반작용이 정당성으로 두둑하게 확보되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지금 감상하고 있는 그림은 청량산 아래 가송협곡의 고산정(孤山亭)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이다. 이 누대정자의 주인은 퇴계의 문인이었던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다. 35세 되던 명종 19년(1564)에 지었는데 워낙 풍광이 뛰어나 스승 이황은 물론, 동문과 재경관인(在京官人)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때의 문사 간 교류의 흔적으로 다수의 시들이 고산정제영(孤山亭題詠)이라는 이름으로 성재집에 수록되어 있다. 퇴계 15수, 이항복2수, 김극일, 성일 형제가 각1수, 김부의, 부륜 형제가 각2수와 1수, 류성룡 2수, 정구 1수 등 고산정과 관련하여 당시 38명 제현들의 증류시(贈遺詩)¹⁹⁾ 78수가 전한다.

그 중 스승 퇴계와 이 집 주인이었던 금난수의 시를 소개한다. 먼저 퇴계의 시 서고산절벽(書孤山絶壁)>이다. 서고산 절벽은 제고산 절벽 또는 서고산 석벽이라고도 한다.

(日洞主人琴氏子)일동이라 그 주인 금씨란 이가(隔水呼問今在否)지금 있나 강 건너로 물어보았더니 (耕夫揮手語不聞)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말 못 들은 듯(愴望雲山獨坐久)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네.

감상한 소회가 어떠한가? 절로 감탄이 나올 만하지 않는가. 이때쯤이면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나와 도산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병약했고 노구였던 스승이 제자가 거처하는 산집을 기별도 없이 방문한 것이다.

그림 속 풍경도 비슷하지만 불러도 대답 없는 제자를 스승은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다. 이 간단치 않은 풍경에서 뭔가 가슴 뭉클함이 가슴으로 차오르는 기분이다. 우리는 흔히 성인이라는 인물을 완벽한 인간의 전형으로 파악하는 습관에 젖어 자잘한 인간사를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아는가? 공자가 애제자 안회가 세상을 버리자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며 대성통곡했다는 사실을. 학문에는 독실하되 인간사에 정감 없는 현자는 없었으니 퇴계는 제자의 거처를 찾아오면서 미리 간다는 소식을 넣지 않았다. 이것은 이타심이다. 제자의 번거로움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걸음은 가벼이 한 것이다.

간혹 보면 배운 틀 없는 자들이 무례하게도 큰스님이나 명망 있는 분들을 뵈러가면서 미리 있나 없나를 확인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이것은 나를 위해 남을 가두는 이기적 행위다. 만나는 것에 방점(傍點)²⁰⁾을 두지 말고 오고감에 의미를 두며 유유자적할 줄 아는 멋스러움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이 시에서 우리가 또 하나 그윽하게 살펴볼 것이 있다. 바로 스승관과 교육관에 관한 것이다. 오지 않은 제자를 마냥 기다리는 동안 스승의 마음에는 온 갓 것들의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학문에는 매진하고 있는지, 가족 건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저것이 마음에 다 걸렸을 것이다. 그저 졸업만 시켜 좋은 학교에 보내면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하는 요즘 선생님의 모습과는 영 딴판인 무한책임의 스승상을 우리는 지금 퇴계의 제자사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퇴계가 56세 되던 여름에 지었다고 추정되는 '유고산(遊孤山)'이라는 시를 한 편 더 감상해 보자. 

이 시는 아래의 성재의 시 '고산정사'에 대해 답해 쓴 시다. 정확하게는 '차운유고산'이라고 해야한다.
퇴계는 제자 성재가 나이는 어렸지만 품고 있는 생각이나 학문이 자신과 어울릴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十年重到訪孤山)십년 만에 거듭 와서 고산을 찾아드니(綠水蒼崖照眼寒)푸른 물 옛 벼랑이 눈에 들어 차가워라(愴主人何處去)섭섭할사 그 주인은 어디로 가고서는(空餘基築白雲間)흰 구름 그 사이에 옛터만이 남았던고'

이시의 제목은 '寄門孤山惺聞遠'이다. 이시 역시 퇴계가 제자인 성재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遙憐絶壁千尋下) 천 길 절벽 아래 사는 그리운 그대는
(茅屋臨流讀古書) 강가에 임한 초가에서 옛 책을 읽는다지.
(靜養工夫能會未) 조용한 가운데 공부는 잘 되고 있는지
(書中眞味近如何) 책 가운데서 느끼는 참 맛은 요즘 어떠한가.

위와 아래의 시에서 우리는 대략이나마 성재의 고산정 생활사를 엿볼 수 있다. 사시사철 고산에서 노닌 것이 아니라, 살림집은 따로 두고 이곳에는 학문이나 문사적 교류, 마음 수양의 장소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성재의 고산정사라는 시다. 그의 학문적 재능과 품은 생각이 상당히 담대 했음을 볼수 있다.

(一歲中間六度歸)한 해에 여섯 번이나 왔었지만(四時佳興得無違)사시 경치 어김이 없었다네
(紅花落盡靑林暗)꽃잎 떨어지자 녹음은 짙어가고(黃葉飄餘白雪飛)낙엽 구른 뒤엔 흰 눈이 날리네
(砂峽乘風披협服) 단사벽에서 바람 쐬니 겹옷 펄럭이고(長潭逢雨荷蓑衣) 매네 긴 소에서 비 만나 도롱이 걸쳤네.
(箇中別有風流在) 이 속에 인간사 재미있으니(醉向寒波弄月輝)취해 찬 물결 향해 달빛 감상하네.

그러나 성재의 학문 탐구의 길이 그리 수월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학문에 집중할 수 없는 여러 사정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성재의 손위 처남이었던 월천 조목이 편집한 사문수간(師門手簡)과 성재집에서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사문수간이란 퇴계 선생과 제자들 간에 주고받았던 편지를 조목(趙穆)이 엮은 것이다.

이 글은 퇴계가 월천에게 사신(私信)²¹⁾을 보내 성재에 대한 답답함과 애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듣건대 문원(聞遠)이 학업을 게을리 한다 하니 슬프고 실망스럽습니다. 이 사람은 애당초 참 좋았는데 무슨 연유로 이와 같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곤궁한 중에서 살려고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골몰한 데 빠져들어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뜻이 독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진실로 뜻이 독실하다면 궁(窮)이란 한 글자가 어찌 그 뜻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사람들은 궁함으로 인해서 마음을 격동시키고 본성을 인내하였기 때문에 하는 학업이 나아갔는데, 지금 사람들은 궁함으로 인해서 뜻을 허물고 외물을 좇기 때문에 학업이 망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우리들이 지극히 경계하고 몹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퇴계가 성재에게 보낸 편지다.
"그대(금난수를 말함)가 예안현감 앞에서 집집마다 바쳐야 할 꿩을 면제해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니, 조카 빙(憑)이 그로 인해 '저희 집에서도 마땅히 꿩을 바쳐야 하지만 꿩을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던데, 실은 내가 이미 꿩 두 마리를 관가에 바친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현감이 다음날 사람을 시켜 이미 바친 꿩을 되돌려 보냈는데, 내 마음이 심히 편안하지 않아 종을 시켜 다시 받아줄 것을 청했으나, 현감이 절대로 들어주지 않기에 부득이 꿩을 돌려받았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해 보니 조사경(趙士敬, 穆)이 꿀을 바쳐야 했음에도 청탁하여 면제를 받았음이 이미 잘못된 것이었고, 그대 또한 꿩을 바쳐야 했음에도 청탁하여 면제를 받았으니 더욱 편안치 않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나마저 바친 꿩을 되돌려 받게 하고 말았으니, 그대들은 어찌 그렇게도 사려가 깊이 못합니까?"

이어서 성재집에 나오는 그의 회고를 잠시 들어보자.
"정미년(1547년, 명종 2년)부터 갑자년(1564년, 명종 19년) 까지 거의 20년 동안 청량산을 다녀간 것이 열두세 번이 된다 ‥‥‥산에 들어 갈 때에는 마음과 생각을 깨끗이 하고 책상에서 책을 보며 몸과 마음을 정리하여 본원(本源)을 함양해서 뒷날에 도를 받아들이는 바탕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다른 세속의 업무에 휘둘리거나 일 때문에 곧장 산을 나와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산문(山門)을 나서자마자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사물의 끝없는 변화를 만나게 되자 마침내 지켜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조금 얻은 것도 함께 다 잃어버려, 모든 언행(言行)에 있어서 한 가지도 볼 만한 것이 없게 되었으니, 도리어 세상 속에 빠져 사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헤매고 있으니 끝내 소인이 되어 버림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로써 사람이 수양하는 것은 학업에 힘씀이 어떠한가에 달려있는 것이지 처해 있는 곳의 시끄럽고 조용한 것과는 관계가 없음을 알았다. 뒷날 산에 들어가는 사람은 나를 보고 경계로 삼으라."

마치 속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고요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갈파한 유마경의 한 구절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문장이다. 가난 때문에 다 피우지 못한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그 잘못된 자세에서 찾고 있다. 이 얼마나 솔직한가. 그러나 미리 말해두건대 행간을 읽으라.

단편적 글 읽기는 정신을 편견으로 가득 채우는 독약이다. 나는 지금 성재가 외물(外物)²²⁾에 빠져 학업에 등한시했다 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보편적 인간사라는 것을 환기시키려 함이다. 우리는 그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한다. 퇴계와 공자, 그리고 고승 또한 별반 달랐으랴. 부모 상례(喪禮)를 여러 이유를 들어 3년을 해야 한다는 공자에 말에 제자 자로가 현실과 맞지 않다면 이의를 제기하자 그가 나간 뒤 신랄하게 흰소리를 했던 공자였다.

성철스님 생전에 타 문중에서 종정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 텔레비전 화면에다 대놓고 안 한다고 불같이 성질내던 그였다. 성인과 고승도 화나면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그게 뭐 그리 대수냐. 일생을 성인되는 공부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했던 퇴계지만 정작 자식에게는 그리 혹독하지 못했다. 서원공부가 출세로 가는 지름길이 되지 못하자 당시 많은 사람들이 과거공부를 요즘으로 치면 입시학원에서 하는 경우가 흔했다.

퇴계는 자식이 영주에 있는 입시학원에 가는 것을 원하자 못마땅했지만 허락한다. 그렇다고 이런 걸 같고 성재와 성철을, 공자와 퇴계를 깔볼 수 있나.

권준 또한 그렇다. 서울 있었으면 좋았을 걸, 대책 없이 고향 내려와서는 무작정 두들겨 맞고 있다. 그런데 멍석말이 하는 이유가 가관이다. 한쪽에서는 그림은 좋은데 너무 남발을 많이 해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너무 쉽게 그림을 그리면서 값을 너무 올려 받는다고 불평이다. 참 가당찮은 소리다. 예술의 만고불변의 진리는 다작에서 걸작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물론, 단 한편의 소설로 일약 스타가 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저자 마가렛 미첼이나 '진주목걸이를 귀에 건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처럼 의외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보편성은 언제나 다작에서 우수성이 증명된다. 피카소는 평생 4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고흐는 죽기 1년 전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다시피 했다.

이들의 그림은 지금 1점당 1천억 원을 호가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근대의 화가들 중 오원 장승업은 도화서를 나온 뒤 배가고파 술 한 잔  밥한 그릇에 그림을 팔았다. 빨래터(옥션에서 40억원에 낙찰)로 유명한 박수근은 친구인 구상시인이 그를 살려놓기 전까지 미군부대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권준 그림이 비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할 말이 없다. 언제가 지인이 물감 몇 번 처바른 것 같은 권준의 그림을 몇 백만 원 주고 샀다고 억울해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셈법이 잘못됐다. 화가가 가령, 단 이틀에 걸쳐 그림 1점을 완성했다고 해서 그림 값이 낮아질 이유는 없다. 그림은 화가의 일생의 노력과 흔적을 단 이틀 안에 집적(集積)²³⁾한 것이다.

때문에 그림 값은 이틀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그림을 그린 나날의 수치와 평가로 결정되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권준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면 잘 간직하고 있으라. 그의 그림은 지금 저평가되어 있다. 그가 가고나면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솟을지 모른다. 구라가 아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시청한 분들은 기억할 것이다. 전 현직 국세청장 간에 추잡한 뒷거래에 고귀하신 고 최욱경 화백의 '학동마을'이 거래되었다는 것을. 가격이 얼마든가? 8호 그림이 4~5천만원에 청탁의 대가로 거래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그렇다면 1호당(엽서 크기) 가격이 5백만원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만이 아니다. 그녀의 대작들은 옥션에서 1억2천~1억5천만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연유가 있다. 최 화백은 미국에서 프랭크린 피어스 대학, 애틀랜타 미술대학, 위스콘신 주립대학 등에서 강사와 교수를 하다가 79년부터 영남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권준이 대학원 조교 때 은사였다.

그런데 그 은사는 보통 은사가 아니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을 만큼 예술적 자존심이 강했고, 생활도 당당하면서 자유분방했다. 노교수와 학장이 자신의 교수실을 찾아와도 피워 물고 있던 담배와 책상 위에다 올려놓은 짧은 치마의 두 다리를 내려놓지 않던 최욱경이었다. 윗사람에게는 버릇없기까지 했던 그녀였지만 퇴근해서는 학교에서 수발들던 권준을 집으로 불러 저녁을 같이 먹기도 했던 다정다감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당당했던 그녀였지만 문득문득 여자로서의 정체성은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권준과 대구의 동성로를 걸어갈 때 최욱경은 임신하여 만삭이 된 여자의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부럽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영남대와의 마찰 때문에 덕성여대로 옮겨간 85년 45세의 나이로 자신의 화실 무무당(無無堂)에서 취해서 잠든 듯이 눈을 감았다. 조사 결과, 음주상태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것으로 밝혀져 자살로 결론지어졌다. 그녀가 좋아했던 화가 반 고흐와 마크 로스크처럼 그녀 또한 자살한 것이다. 숨진 지 5시간이 지났으나 음반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구스타프 말러의 '부활'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뒤 남겨진 500여점의 작품들은 한국 추상표현주의를 개척한 작품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그런 그녀의 작품 중에는 권준과 공동 전시회를 연 작품들도 여러 점 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는지 눈치 말짱한 이들은 벌써 알아 차렸으리라. 그리고 덧붙일 말이 있다. 최욱경이 위대한 인간으로 평가받는 것은 예술을 향한 웅혼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가지를 버리고 줄기만을 취하듯 인간사의 평가도 곁가지가 아니라 본체요 요체만을 두고 말할 뿐이다. 이는 권준의 색신(色身)²⁴⁾의 모자람과 더러움을 회피하거나 변명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예수가 올리브 산에서 살고 싶어 하나님에게 애원했다고 해서 그의 신으로 향했던 법신(法身)²⁵⁾이 작아지거나 훼손되는 것이 아니듯 무릇 모든 위대한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란 언제나 그들이 추구하고자 한 바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고산정을 이야기하다가 너무 먼 길을 돌아가 버렸다. 다시 성재의 이야기를 좀 하겠다. 금난수를 논하면서 그의 막내아들의 비범성을 빠뜨릴 수는 없다. 성재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가 하나 같이 뛰어났다. 그 중 막내인 금각(琴恪)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다. '선성지'에 그의 7, 8세 때 천재성을 논한 기록이 있다.

萬理皆備 朝廷得失 世上人事 皆已理會(만 가지 이치와 조정의 득실과 세상의 인사를 모두 터득하였다)이 말은 학문이며 정치, 사회와 인간관계를 7,8세에 터득했다는 말이다. 성재는 그런 아들을 퇴계의 문인인 하곡이 있는 서울로 유학 보낸다. 하곡 허봉은 홍길동의 저자인 교산 허균의 형이며, 난설헌 허초희의 오빠다. 시문에 능통했던 하곡은 17세 전후에 금각에게 준 시 구절에 "금각의 시는 이태백을 능가한다."고 했다. 아래의 글은 그가 16세에 쓴 일동록(日洞錄)이라는 문장이다. 

"선성 북쪽에 산이 있으니 청량이요, 그 남쪽에 봉이 있으니 축융이다. 축융 아래는 '일동日洞'이다. '日'이라고 한 것은 동리에 '월담月潭'이라는 못이 있어서 병처럼 좁은 지역에 日月 가운데 그 하나만을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동리는 그윽하고 조용하며 산은 높지만 좁지 아니하여 '어진 사람이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함'을 겸했으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아갈 만한 낙지(樂地) 서른여섯 곳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땅이지만 아직 이곳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 별천지 세계가 황폐한 숲 속에 버려져 있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알지 못한다. 그 후 아버지가 계시어 이곳을 드러나게 하였으니, 이곳은 곧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했다가 내어준 것이리라."

그런데, '천재는 박명하다'고 했던가. 금각은 불과 18세에 요절했다. 외삼촌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은 제문을 지어 추모하며 천재가 쓰이지 못하고 사라짐을 애통해했다.

여기서 하곡이 거론 되었으니까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하나 짚고 넘어가겠다. 성재가 살던 시절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성재는 임란에 임해서는 노모를 모시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몸을 의탁했고 정유재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국난을 온 몸으로 헤쳐 나간 공로로 봉화현감이 되었던 인물이다.

궁금한 것은 언제가 글을 읽다가 홍의장군 곽재우가 전쟁터에서 어머니 상을 당하자 병영(兵營)을 나와 3년간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상주노릇을 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이 점에 비추어 국난에도 효가 허용되었던 것은 조선사회의 문화적 풍토와 관례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렇다 해도 정작 내가 이해 못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교육이다. 강단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매뉴얼에는 학봉 김성일이 임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없다고 한 보고가 당파적 견해 때문에 나라를 그르쳤다는 식의 일률적 교육패턴이다. 이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은 소리인데 아마 공부를 대충한 학자들의 대갈통에서 나온 발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고쳐야 한다. 그때 상황을 재조명하면 이렇다. 조정(선조)에서는 일본이 전쟁 기미를 보이자 이를 염탐하는 차원에서 통신사를 파견한다. 정사에 황윤길, 부사에 김성길, 서장관에 허성을 임명해 일본으로 보낸다. 그런데 갔다 와서 임금 앞에의 보고는 정사와 서장관이 견해를 같이했고, 부사의 진언만이 정반대였다. 황윤길과 허성은 전쟁이 일어나니까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한다는 주청을 했고, 학봉은 일본이 그럴 능력이 없다고 보고를 한 것이다.

결과는 전쟁이 일어나 버렸는데 이 같은 엄연한 사실 하나를 두고 정반대의 의견이 개진된 것은 순전히 당파적 이해심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 지금껏 역사학계의 정론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건 구라 중에서도 완전 개구라다. 당파로 치면 서장관인 허성은 금각의 스승인 하곡 허봉과 교산 허균의 형이며 허난설헌의 오빠다. 이들이 누구인가? 동인의 핵심 인물인 허엽의 자식들이다. 허엽의 스승은 또한 동인인 모재 김안국이며 허성의 처남은 퇴계의 제자인 우성전이다.

때문에 학봉과 우성전 또한 동문수학한 처지로 각별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엮여 있는 것이다. 이때의 사건은 당파적 견해라기보다 학봉이 정세 판단에 동인들이 많이 동조를 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다시 말해 파당의 견해를 학봉에게 억압한 것이 아니라 학봉의 견해에 동인들이 따른 것이다. 물론 정세 판단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이때의 사안을 바라보는 방식은 별개로 분리해서 이해하여야 보다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그림 보는 주제를 '관조와 고독'으로 명명했으니 재미난 일화 하나를 덧붙이고 글을 끝맺겠다. 불교에서의 선문답은 0.3초 내에 완성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생각이 들어갈 여지없이 막 바로 뱉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승과 고승이 마주 앉았다. 먼저 한 고승이 운을 뗀다. 이 사람아 해탈이 뭔고. 아 그거야 저 선방 앞에 있는 잣나무지. 허허, 이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해탈이 저 선방 앞의 잣나무라니. 그런 자네는 해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선방 앞에 있는 잣나무지. (두 사람 동시에)하하하하. 이 정도는 되어야 관조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발칙한 상상을 한번 해보자. 유학자였던 우리의 퇴계 선생은 어떠했을까? 참고로 조선말의 대사건 중 하나인 서원철폐는 말 탄 사람을 강제로 내리려다 발생(?)한 일이다. 조선이 일제에 병합 당하자 지식인 노릇하기 힘들다는 절명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운현궁(흥선대원군을 말하는 것임)이 젊은 시절에 우암 송시열을 주향으로 배향한 화양서원에 들렀다가 원유(院儒)²⁶⁾에게 모욕을 당하여 이를 매우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정권을 잡자 그 선비를 죽였다."

지금 화양서원 터에 세워져 있는 화양동 사적비는 이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조선말 패려한 사람(흥선대원군)이 나더니 이곳을 지나가면서 황묘에 봉심할 때 예를 다하지 않아 꾸짖음을 당하고서도(구체적으로 만동묘 앞의 하마비를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은 일로 발길에 차이는 모욕을 당한 것)깨닫지 못하고 이로 하여 만동묘를 비롯한 전국의 서원을 일부만 남기고 모두 훼철하였다‥‥‥ "

이제 해답이 나간다. 선생이 도산서당에 앉아 있는데 들 앞에 말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서당의 일을 맡아보는 스님이 "그 사람 행동이 과합니다. 선생님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퇴계 선생 말씀이 관조의 백미(白眉)²⁷⁾고 선문답의 극치(極致)²⁸⁾다.
 "말 탄 사람이 그림 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겠는가?"하였다.

도산서원이 선생 사후에도 지금껏 전국 최고인 이유를 이제 알겠지요. 그럼 오늘이야기는 여기서 끝냄시더.

注.
1. 시동(侍童) - 귀인에 딸려 그 밑에서 잔심부름하는 아이.
2. 초두(初頭) - 처음 무렵이라는 뜻이다.
3. 오수(午睡) - 낮잠이라는 의미다.
4. 행간(行間) - 글줄과 글줄의 사이
5. 관조(觀照) -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거나 음미함.
6. 의구(依舊) - 옛 모양과 변함없음.
7. 심상(心想) - 마음의 생각.
8. 유적미학(幽寂美學) - 깊숙하고 고요함을 표현하는 미학.
9. 육화(肉化) -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남.
10. 돈실(敦實)  -극진하고 부지런함.
11. 미편(未便) - 편안하지 않음.
12. 기미(幾黴) - 앞일에 대해 다소 막연한 예상이 들게 하는 어떤 현상이나 상태. 낌새
13. 사문난적(斯文亂賊) -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이르는 말.
14. 파란(波瀾)- 순조롭지 않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곤란한 사건.
15. 곡절(曲折) -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
16. 화맹률(畵盲率) - 그림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들의 비율.
17. 환치(煥置) - 바꾸어 놓음.
18. 열패주의(劣敗主義) - 남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패배주의.
19. 증류시(贈遺詩) - 지난날 어떤 곳을 들러 구경하고 놀면서 지은 시.
20. 방점(傍點) - 글 가운데서 보는 사람의 주위를 끌기 위해 글자 옆이나 위에 찍는 점.
21. 사신(私信)- 개인의 사사로운 편지.
22. 외물(外物) - 바깥 세계의 사물. 즉, 공부를 방해하는 외적인 요인이라는 뜻이다.
23. 집적(集積) - 모아서 쌓음.
24. 색신(色身) - 육안으로 보이는 몸. 
25. 법신(法身) - 불법의 이치와 일치하는 부처의 몸. 여기서는 거룩한 정신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26. 원유(院儒) -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
27. 백미(白眉) - 흰 눈썹이라는 뜻으로, 여럿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훌륭한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8. 극치(極致) -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취나 경지.

2009-02-01 19:09:28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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