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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18-10-19 15:52:08
<우리동네-안동시 풍산읍 마애리2>
우리 마을은 나무 하나는 부자로 살았지
나무 팔아 물길 연 마을 마애
[안동시 공동 기획연재] 2018 안동·예천 근대기행(7)
 
나룻배 타고 간 화전놀이
'살림배'이자 '생명선'이었던 피난 곳의 나룻배

▲망천절벽 뒤편 산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이호민

프롤로그
 
풍산면 마애리에서 남후면 방향으로 단호교를 건너면 망천절벽 뒷편 산으로 갈 수 있는 임도가 있다. 이주현 이장님께 전해들은 말을 따라 무작정 마을 전경 사진을 찍을 장소를 알아두기 위해 차를 타고 올랐다. 산길 외에는 사람의 손길을 탄 흔적이 없는 그곳은 야생 그대로였다. 기획연재는 둘째 치고 외딴 곳에서 멧돼지라도 만나면 어떡하나 불안감이 밀려왔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우람한 멧돼지 한마리가 성난 얼굴로 떡 하니 버티고 있을 것 같았다.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곤 후진하는 것인데, 바로 옆 아카시아 나뭇잎 사이로 낭떠러지가 보였다. 겨우 생각해낸 대안이란 멧돼지와 눈 마주치지 않기(실제로는 멧돼지를 만났을 때 눈을 마주쳐야 한다고 한다), 멧돼지가 싫어하는 행동 하지 않기 정도였는데, 정작 멧돼지가 무엇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리곤 이내 체념 섞인 한마디가 지나갔다.

"모르겠다, 그냥 가자."
 
깊은 산은 근대와 현대와도 무관한 야생의 시간이 흘렀다. 바로 몇 만 년 전 이곳, 마애리에 살았다던 그 구석기인들의 시간이 이러했으리라.

내비게이션은 아까부터 "재탐색 결과, 출발지 주변에 안내 가능한 도로가 없습니다."라는 경고 메시지만 남긴 채 길안내를 멈췄다. 내비게이션이 불통하는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 근대기행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살아본 적 없는 시간과 장소를 여행한다는 것. 안내 가능한 길이란, 오로지 마을 사람들의 말과 기억 뿐. 그것을 더듬으며 가는 것이 근대기행이리라. 약간의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오르자 어느새 탁 트인 하늘이 보였다. 더 이상 오를 길이 없을 때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이장님께서 말씀해주신 그 위치도 찾았다. 말길을 따라 정확히 그 장소를 찾았을 때의 쾌감은 길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줬다.

▲마을에서 바라본 넓은 마애들판 ⓒ이호민

며칠 뒤 마을 전경을 찍기 위해 산 중턱에 다다랐을 무렵, 수풀에서 작고 검은 짐승 서너 마리가 후두두둑 문명의 바퀴에 놀라 달아났다. 뒤꽁무니에선 하얀 먼지가 보송하게 일었다. 멧돼지 새끼들이었다. 가까운 어딘가에 어미 멧돼지가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난 번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짧은 시간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짐승들은 몇 만 년 전 구석기인들이 봤던 무구한 모습 그대로 먹이를 구하며 살고 있다. 짐승의 놀란 눈동자는 그들과 우리의 시간을 매우 아득하게 느껴지게 했다.

마을 전경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고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주민들의 말과 기억을 더듬으며 다시 두 번째 마애리 기행을 시작해본다. 이번 기행에서는 마애리 주민들은 왜 나룻배와 헤어졌는지, 마을의 획기적인 변화가 된 지점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애리 입구

처녀가 시집가기 전 쌀 서 말 못 먹던 마을

마애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계신 이규섭(75세, 1944년생) 씨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이장을 맡았다. 풍산초등학교를 거쳐 병산중학교(현 풍산중학교) 12회 졸업생이다. 당시엔 졸업앨범을 만들지 않아 사진 기록이 없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962년도에 나무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8살 무렵이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처녀가 시집가기 전 쌀 서 말을 못 먹던 마을이라 할 정도로 물이 부족했던 마애. 조봉순 할머니의 창고에서 발견한 말. 한 말은 열되다.

"지금은 강이 오염이 돼가지고 벌레도 많은데, 그때는 거의 보얀 모래 백사장 이랬어요. 모래사장 자체가 넓었지, 자갈도 별로 없었고. 우리 클 때는 여름에 거서 잠을 잤어요. 놀다가 누우면 그냥 자요. 모기 안 뜯지, 이불도 필요 없고 하니까 친구들하고 놀다가 눕는 데가 내 잠자리였어. 그런 식으로 여름엔 살았어."

여름밤이 되면 강은 아늑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하지만 관개시설이 정비되지 않았던 1960년대, 바로 코앞에 강을 두고도 논밭엔 언제나 물이 모자랐다.

"그때는 말하자면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쌀 서 말을 못 먹고 간다고 할 정도로 물이 없었어요. 천수답(天水畓)이라고 해서 비 떨어지는 거 그것만 쳐다봤죠."

천수답은 오로지 비가 와야만 모를 심을 수 있는 논을 말한다. 하늘만 쳐다보고 땅만 팠다는 주민들의 말은 한 치의 비유도 섞이지 않은 오롯한 현실이었던 것.

"그때는 식량이 급하니까 보리, 조농사를 해가지고 주로 겨울에는 노란 조밥 그게고, 여름에는 꽁보리밥을 먹었어요. 식량이 급하니까 돈 만드는 건 생각을 못했거든. 그러다가 문중에서 70년대 중반 경에 앞산에 있는 큰나무들을 개인업자한테 팔아가지고 전기 넣고 양수장도 그 돈으로 맡아가지고 운영했지요. 지금도 양수장은 마을에서 운영해요. 정부양수장이 아니래요."

이 마을에서 태어나 농사짓고 사시는 이봉석(71세) 씨는 1969년도 경, 초가삼간에 전기가 들어오는 걸 보고 군대를 갔다고 한다.

▲공수교육을 받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하는 이봉석 씨. 초가삼간에 전깃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입대를 했다.

▲1970년대 5사단 36연대 수색중대에서 복무했던 시절. 오른쪽 통기타를 들고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이봉석 씨.

"앞산에 있는 그 소나무가 가치 있는 소나무랬거등. 그냥 땔감으로 사용하는 소나무가 아니고 집 지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거랬어. 그 소나무를 팔아가지고 다른 동네보다도 전기를 일찍 끌어들인 거야. 그때는 정부에서 전기공사를 안 해주면 해내지도 못했는데 마을에서 자력으로 나무 판 돈으로 전기를 넣어가지고 백열등 30촉짜리를 호롱불 대신에 쓴 거지. 말하자면 산에 나무 팔아가지고 전기 넣고 그때부터 강에 물을 끌어올려가지고 물 걱정을 덜 한 거지."

▲양수발전소. 나무를 팔아 양수발전소를 만든 후부터 마애들에는 천수답이 사라졌다.

▲양수발전소

나무 팔아 물길 열자 천수답 사라져

전기가 들어오면서 마을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생활의 변화도 있었다.

"물이 활발하게 들어오니 어디든지 모를 심어도 됐지. 인제 물 걱정이 없으니까. 그때 박 대통령 시절에 통일벼 카는 게 있었어요. 통일벼가 보급이 돼가지고 농사를 지으니까 쌀 걱정이 없어서 쌀밥을 먹게 됐어요. 그때부터 거의 옛날 먹던 보리밥, 조밥은 거의 없어지고 쌀밥으로 대체된 거죠. 획기적으로 많이 바뀐 거죠. 나무를 판 게 그게 결정타죠."

마을에 물길이 들어오자 활력이 생겼다.

"그때부터는 삶의 질이 좋아졌어요. 차츰차츰 특수작물도 하고. 지금까지도 수박을 많이 하는데, 그 수박농사도 물을 마음대로 하게 된 그때부터 시작했어요. 지금도 수박은 물을 안 쓰면 안돼요. 제일 많이 물을 먹는 작물인데, 물이 마음대로 되니까 무슨 농사든지 하고 싶으면 할 수가 있으니까. 그래그래 했는 게 결국은 뭐 우리 마을에는, 물론 쌀농사도 쌀농사지만 쌀농사보다는 수박농사가 결정적이죠. 그걸로 해가지고 돈 만들어서 애들 키우고 학비 주고, 모든 게 거기서 출발했어요. 내가 딸 둘, 아들 둘 사남매 뒀는데 다 수박농사 지어가지고 그 돈으로 키운 거예요."

수박농사는 1980년 후반 무렵부터 2000년까지 활발했는데, 이규섭 씨가 마을 주민으로서는 처음 수박농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창 많이 할 때는 마을 주민 반 이상이 수박농사를 했다. 나무를 팔아 물길을 열면서 천수답은 사라지게 되었고, 그 물로 수박 등 특수작물을 할 수 있는 풍부한 토대가 마련됐다.

▲마을에서 함께 자란 동무들과 함께. 청일점으로 함께 사진을 찍은 이규섭 씨.

"간이 상수도는 독지가가 여기 와서 해줘가지고 그것도 빨리했어. 정부에서 오는 그 수도가 아니고, 우리 마을에서 자체로 상수도를 만들어가지고 여기서 낙동강 물을 올려가지고 집에서 수도꼭지 틀면 나오도록 했지. 그게 한 70년대 후반 정도였는데, 딴 데보다 일찍 했지. 서울 있는 독지가가 거의 해줬지. 그 분이 여기 자손인데, 마을에 살지는 않았고 기부를 했지. 그때 뭐 촌에 있으면 시골에 화투나 하고 그런 거 하지 말고, 부업을 해가지고 생활에 도움되라고 새끼를 꼬을 수 있는 새끼틀을 집집마다 한대씩 다 사줬어. 전기에 꼽으면 모터로 새끼틀이 돌아가 새끼를 꼬아서 팔아가지고 생계수단으로 하라고. 그 사람 웃대부터 객지에 나가서 살았지. 그 사람 삼촌도 여기 살고. 서울에서 돈을 좀 벌었으니까 뭔가 좀 해보겠다고 마을에 돈 많이 쓰고 갔지. 새끼틀을 집집마다 주면서 집에서 꼬아서 경로당 옆 창고에다가 한데 모아서 팔기로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 사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고. 그때가 새끼줄을 잘 안 쓰고 나이롱줄로 넘어가는 시기였어.(웃음) 취지는 좋았지. 농한기에 화투하지 말고 부수입으로 하라고. 겨울에 할 일이 없으니까. 그때는 노름이 많이 성했거든."

▲1970년대 망천절벽 앞 나룻배 (사진:조봉순)

나룻배 타고 화전놀이가세

가난한 시절에도 봄은 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봄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봄이 되면은 그때는 화전놀이라고 그랬어. 요즘 같으면 뭐라 글꼬. 매화꽃 피고 이런 거 할 무렵에 일찍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잔치를 벌이지. 이 배를 타고 저 절벽 밑으로 오르내리면서 봄에 한 번씩 화전놀이를 하고 놀아. 다르게 노는 게 아니고, 망천절벽 쳐다보고 뭐 그렇게 놀았지. 60년대 후반까지는 그런 게 있었어. 예전에는 그렇게들 놀았지 뭐."

화전놀이에 대해서는 이규섭 씨와 지근거리에 사는 김용분 할머니(88세)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쌀 한 시끄때(놋그릇 사용할 때 덮는 밥뚜껑을 경상도말로 이르는 말) 그걸로 하나씩 가져오면 한 사람 먹는 양이 되거든. 그걸 모아가지고 밥을 해먹었어. 돈 있는 사람은 몇 푼씩 내서 술 몇 되씩 사와서 얹고. 밀가루 있는 집은 밀가루 내서 전도 붙이고. 그래 모아가지고 음식을 만들고 즐겁게 놀았지. 그때는 이 동네에 사람이 많았어. 지금은 여자 혼자 사는 집이 스무 집이래. 아이고…"

당시 경상도 지역에선 이렇게 화전놀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나 보다. 영주 순흥 지역이 무대가 된「덴덩어미화전가」에 수록된 '화전놀이 준비'에 보면 꼭 이 같은 풍경이 그려진다. 한 대목을 옮겨오면 이렇다.

어떤 부인은 마음이 커서/ 가루 한 말 퍼 내놓고/ 어떤 부인은 마음이 작아/ 가루 반 되 떠 내주고/ 그렁저렁 주워 모으니/ 가루가 닷 말 가웃이네./ 어떤 부인은 참기름 내고/ 어떤 부인은 들기름 내고/ 어떤 부인은 많이 내고/ 어떤 부인은 적게 내니/ 그렁저렁 주워 모으니/ 기름 반 동이 다 뇌누나.

마애리 화전놀이도 이 같은 풍경이지만 젊은 층에서는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애 터줏대감 이봉석 씨

"옛날 법으로 50~60대만 모여서 상어른들 뫼시고 그래 한 번씩 놀았지, 젊은 사람들은 감히 거기 놀라고 마음도 못 먹었어. 애 키우고 가정 일을 하면 가정일 볼라네 (바빴어). 어른들도 쌀 한시끄때씩 모아가지고 놀러가는 게 큰 행사랬거든. (웃음) 하도 가난한 시절이다 보니."

그날은 장정 한 사람을 불러 술과 점심을 대접하며 나룻배의 사공 역할을 맡겼다.

"저 위(현재 단호교 위치)에 배를 끌어올려놓고 거기서부터 배를 타고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서서히 떠내려 오는 거지 뭐."

▲?위 화전가는 이봉석 씨의 노모 김용분 할머니가 예안면 천전리에서 손수 필사해 온 기록모음집에 수록돼 있다.

놀이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배 위에서 화전가를 부르며 봄날의 풍취를 한껏 즐겼다. 예안면 천전리가 고향인 김용분 할머니가 친정에서 손수 베껴온 내방가사, 각종 제문, 화전가 등이 빼곡히 적힌 두루마리 한 꾸러미를 꺼내왔다. 아들 이봉석 씨가 "요새로 말하자면 기록모음집이래."라며 쉽게 풀어 설명해주신다.

"이거는 친정에서 내가 크면서 보고 듣고 한 걸 베껴온 거래. 화전가 뿐만 아니라 다른 가사도 이렇게 한 권에 스무 장씩 메운 책이 몇 권이나 됐는데,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빌려갔다가 안 돌려주고해서 요고밖에 안 남았어. 나도 세월이 지나가니까 안챙겼지 뭐."

"우리 어무이가 이 동네에서 말하자면, 한마디로 문장가거든. 사돈지(안사돈끼리 써서 주고받은 순 한글 편지) 대필 많이 했고, 제문도 많이 지어줬고."

오래된 한지 속엔 그때의 화전가도 고이 잠들어 있다.

"시베리아 찬바람이/백두산을 넘어들어/삼천리 우리 강산/제멋대로 노려낸다/천지현황(*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어느 땐고/우주홍황(*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음)이때로다/비는 어찌 물이 되고…(중략)" 

첫 소절부터 광활한 대자연에 몸을 맡기며 시취(詩趣)에 젖어들게 한다. 이제 봄이 와도 불러주는 이가 없지만 한때 주민들의 시름과 흥취를 담아 봄강에 흘려보내는 매개체였다. 당시 화전가의 가사내용을 살펴보면 옛날식 표기지만 삼라만상 속의 인간살이에 대한 시름과 고민들을 엿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걸 머릿속에 외웠지."

▲기록모음집에 수록돼 있는 옛 제문을 설명해주는 이봉석 씨.

노모의 말씀을 듣던 이봉석 씨는 "이게 생활문화래. 저녁에 옛날 사람들 할 일이 뭐 있나. 호롱불 켜놓고 이런 거나 보고…" 한마디 거든다.

책이 워낙 귀한 시절이다 보니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글 읽을 줄 아는 사람을 앉혀놓고 어제에 이어 다음 장을 읽어 달라 보채곤 했다. 가난한 시절을 떠올리면 으레 배가 고팠다는 이야기만을 떠올리지 사람들이 새로운 이야기에 굶주려 있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총기 있는 어느 어른은 전날 밤 들려준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까지도 또렷이 외워 오히려 글 읽는 이에게 알려줄 정도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세월에 잃어버린 기록모음집도 그와 같은 굶주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칠흑 같은 밤, 호롱불 아래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뜬 사람들의 생기어린 얼굴이 어른댄다. 대청마루나 방안은 곧 이야기의 무대이자 낭독의 공간이 됐을 것이다. 그 밤풍경이 참 아름답다. 고된 농사일의 피로함을 뒤로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호롱불 앞으로 달려왔을테니 말이다. 그런 밤을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마애리 화전놀이를 책임졌던 나룻배 (사진:조봉순)

나룻배를 관통한 전쟁의 상흔

다시 나룻배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룻배는 마애리 화전놀이에서 빠질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마애리 주민들에게 나룻배는 여러 의미를 지닌다. 누구는 살림배라 불렀고, 누구는 생명선(生命船)이라고도 불렀다. 생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근 마을에서도 이런 나룻배가 흔치 않았는데, 그 규모도 제법 컸다. 이규섭 씨에 의하면 배 폭이 2m, 길이도 25~30m 정도 되었다고 한다.

▲이규섭 씨 부부

"나무 두께가 사사목, 한옥 기둥 택이야. 그걸로 착착 착착 네모반듯하게 요리 네 치, 저리 네 치. 요즘으로 말하자면 공사판에 쓰는 나무 같은 그런 거랬어."

나룻배는 한번 제작하면 몇 십 년은 쓸 수 있었는데, 특히 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뱃바닥은 아주 오랫동안 내려오던 것이었다고.

▲부부의 약혼사진. 이웃에 살던 시고모님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

"뱃바닥은 우리가 어릴 때 해가지고 누가 했는지 잘 몰래. 맹 그분이 했을 거야. 배 옆에 전은 물에 노출됐다가 말랐다 해가지고 빨리 썩는데 밑바닥은 물에 담겨 있기 때문에 안 썩어."

그분은 남후면의 강 대목을 이른다.

"그 나룻배 앞쪽으로 보면 가운데 땜방을 해놓은 게 있었어. 그게 6?25사변 끝 무렵에 비행기 폭격을 맞은 자리래. 위에서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기관총으로 쐈지. 다라라락-한참을 그랬어. 그때 우리는 방안에서 꼼짝도 안하고 숨어서 안 나왔어. 그거는 기억할 수 있어."

지리적으로 ‘피난 곳’이라 불리던 마애리는 전쟁 중에도 인민군이 한 명도 들어온 적 없을 정도로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날도 마을 남자들은 어김없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이었다. 하지만 마른하늘에 난데없이 빗발치는 총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날의 충격과 공포, 간신히 살아남은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병산중학교(현 풍산중학교) 재학시절 소풍 기념사진

"그게 왜 그랬느냐 하면은 그 배에 나무를 싣고 오면은 스물 몇 짐쯤 실어. 한 배 꽉 채우면 쫙 (지게를 차곡차곡) 짜가지고 온다고. 위에서 보이 그게 무슨 보급선인 줄 알고 비행기가 쏴 뿐 거지. 그때 들은 소리인데 그래서 쐈다카더라고. 다행히 사람은 하나도 안 죽었어. 다친 사람도 없고, 배 가운데 구멍만 하나 난 거지. 그래서 땜방을 했는데… 배가 얼추 컸다는 얘기지."

▲스무살 무렵 동네 친구들과 함께 우정을 기념하며 찍은 사진. 맨 뒷줄에 있는 이가 이규섭 씨.

나무를 해오는 모습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보급선처럼 보였을 거라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강변에 떨어진 탄피들을 줍고 놀았다고 하니 그날의 총격이 어땠을지 가히 짐작 된다. 나룻배를 ‘살림배’와 ‘생명선’이라고 여기던 이유를 이 전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발견한다.

▲1970년대 후반 집 마당에서 어머니, 사촌누나와 함께한 이규섭 씨.

급류에 떠내려간 나룻배 찾아 나서기도

밑바닥에 전쟁의 상흔을 안고도 배는 건재했다. 마을에선 배를 전담 관리하는 사람을 1년간 지정해 운영했는데, 관리를 맡은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이면 물 밖으로 배를 꺼내는 일을 했다. 혹 급류에 배가 떠내려가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배가 떠내려가면 나무를 못하니 큰일 나는 거지. 생명선(生命船)이나 마찬가지지"

그런 나룻배도 억수같이 비가 내린 어느 날 급류에 떠내려간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애가 타 강길을 따라 배를 찾아 나섰다. 배가 정박한 곳은 풍천면 구담의 한 강기슭. 병산서원을 지나 하회 부용대를 지나 굽이굽이 흘러 그곳까지 떠내려 간 것이다. 나룻배에게는 첫 여행이었을 것이다.

이규섭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망천절벽 깊은 산 속에 살던 한 나무의 일생이 떠올랐다. 땅 속 깊이 뿌리박고 오랜 세월을 산 나무. 어느 날 솜씨 좋은 대목의 눈에 띄어 도끼질에 쓰러진 얼마 후 다시 나룻배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우거진 나무들의 일생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물 위의 다리가 된다. 나무의 일생은 이렇듯 언제나 이롭다.

"우리 마을은 나무 하나는 부자로 살았지"

이봉석 씨의 이 말 속엔 생략된 것이 하나 있다. 나룻배. 가난한 시절에도 이곳에서 나무가 풍요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룻배는 마애리 주민들의 생활사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근대의 '사라진 유물'이자 '물 위의 길'이었다.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자연과 사람의 관계가 매우 밀착돼 있었다는 것을 이곳을 취재하며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룻배가 사라진 것은 언제쯤일까? 이규섭 씨에 의하면 70년대 후반 무렵, 연탄을 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논에 물이 들어오니) 들농사에 집중을 하고 연탄이 들어와 연탄을 때기 시작하니 나무가 필요 없잖아. 자연스레 나무하러 안 다니게 되지. 그니까 배를 이용 안했지. 예전같이 관리를 잘 안하고 방치를 하다보니까. 물에 띄워놓은 나무니까 썩게 되고, 결국은 없어졌지."

나룻배는 시대와 함께 사라지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번쯤 오래된 무용담을 꺼내보며 으쓱거려보기도 했을까. 아니면 급류를 타고 떠난 여행에서 본 새로운 마을과 강길에서 또 다른 그 무엇이 되는 꿈을 꿨을까.

▲남후면 단호리에서 마애리쪽으로 바라본 단호교.

피난 곳이라 불리던 마을에 생긴 다리

2001년에 완공된 단호교는 꽤 길고 높다. 다리 길이만 440m, 높이가 9m다. 특히 단호교에서 마애리로 건너갈 때 보이는 산맥이 장관이다.

"옛날에는 여기를 피난 곳이라고 그랬거든. 풍산에서 들어오면 바로 되돌아 나가야 돼. 딴 데로 갈 곳이 없어. 도로가 없으니까. 단호교가 놓이면서 (외부와의 소통이) 완전히 자유로워졌지."

단호교는 이규섭 씨가 이장으로 있었던 때 만들어졌다.

"사실 좀 사연이 있어. 우리도 여기 다리를 놓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고. 그게 정부에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예산이 한 170 억이 들어간 공사였는데. 여기에 그만큼 예산을 넣어가지고 할 가치가 없잖아. 이 예산이 원래는 병산서원에서 인금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놓을 계획을 하고 받아온 건데, 그때 병산서원 앞으로 길 나가는 거, 버스들이 왔다갔다 그러는 거 안된다고 반대를 했거든. 그 예산을 쓰긴 써야 되고. 그래서 우리 마을에 넣게 된 거지. 이 다리는 어부지리로 온 거지. 내가 생각해도 올 곳은 아닌데. 그래 가지고 이 동네도 발전이 많이 됐고, 이 앞에 솔숲공원도 생기게 되고…"

어부지리로 온 다리는 이곳 풍광에 퍽이나 어울린다. 그래서 자전거길을 종주하는 사람들에게 단호교에서 바라보는 마애리는 탄성을 자아내는 구간이기도 하다. 다리가 생기면서 자연히 마애솔숲공원에는 외지 사람들도 많이 오게 됐다.

"그래도 방해 된다고 생각을 안 해봤어. 외지인들이 안 들어오던 곳에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오니까 좋아."

40년간 한 번도 셔터를 누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카메라

"할 얘기가 뭐 있나 했는데 얘깃거리가 자꾸 나오네.(웃음)"

마을 이야기를 한참 하던 이규섭 씨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6~70년대 사진이 있냐고 두어 번 물었을 때 그는 사진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때 우리는 카메라도 잘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내 여 카메라 사놓고 한 번도 안 찍은 카메라가 여기 있는 데 뭐. 40년도 넘었어. 한 번도 안 찍었어. 필름도 한 번 넣어보지도 않았고. 그때는 필요해서 샀는데, 사고 나이께네 한 번도 안 찍었어."

그 말을 그대로 받아적자, "그런 건 적을 필요도 없어."라고 겸연쩍어 한다. 자신의 얼굴을 언제나 기록하고 SNS에 도배하는 시대에 이 말은 낯설게 들린다. 40년간 한 번도 사진을 찍어 본 적 없는 카메라라니. 카메라는 분명 사진을 찍는 도구이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동안 한 번도 사진을 찍어본 적 없는 이 희귀한 카메라를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아 다시 물어보았다. 그는 "사놓긴 사놓고 찍을 일도 없고...하며 쑥스럽게 말한다.

▲이규섭 씨의 카메라.

무엇이 찍을 만한 것이고, 무엇이 찍을 만한 것이 아닐까. 사생활 노출 과잉인 지금과 달리 당시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에 대해 지극히 사소한 부끄러움, 혹은 어떤 분별을 두었던 것 같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의 카메라는 지금의 수다스러운 카메라와는 결이 다르다고 기록해두고 싶다. 그것을 ‘잃어버린 근대의 시선’이라고 기록해둔다. 40년간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은 자동필름카메라. 이런 사물 앞에서 어떻게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일까. 그것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든 기록의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그 사진기가 아직도 있어요?"

"그럼, 있어."

그 사진기를 찍어야겠다고 하자, 그가 서랍장에서 오래된 자동카메라를 꺼내왔다. 자동카메라는 세월의 흔적에 흠짓만이 조금 남아있을 뿐이었다.

"필름을 넣어보지도 않했어.(웃음) 내가 카메라를 들고 찍지를 안하니까 남겨둘 게 없지 뭐. 뚜껑을 안 열어봤어. 열 줄도 몰라. 허허허. 사람으로 치면 임자를 못 만났지."

카메라의 내부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규섭 씨의 말에 따르면, 이 카메라를 맨 처음 열어본 사람은 필자가 된다.

▲40년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자동필름카메라

짧은 기행에서 만난 것은 사람이기도 하고, 당시 사람의 시선이기도 하며,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잊혀진 사물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들은 과거 속에 박제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으로 탐사할 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 오래된 것들은 지금의 세대가 미처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단순한 목재 이상의 의미를 지니듯 말이다.

▲마애리의 가을 들판 ⓒ 이호민

발터 벤야민은 "모든 새로운 것들 속에는 오래 된 것들이 숨어 있다."라고 했다. 마애리를 취재하며 "모든 오래된 것들 속에는 새로운 것들이 살고 있다."로 읽혀진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잃어버린 관계성, 사람살이의 한 풍경, 사물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이다. 대량 생산, 대량 복제의 시대에 염증을 느끼는 우리가 언젠가 다시 찾게 될, 혹은 회복해야 할 맨 처음의 표정 같은 것이다.
  2018-10-19 15:52:08 / 안동시 공동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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